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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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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내 눈앞의 전선>

내 눈앞의 전선

시가 覺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낯설어 보일 것이다. 시가 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미래로 보일 것이다. 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내 시는 질문이다. 얇디얇은 존재 하나를 뚫고 나오는데 60년이 걸렸다. 겨울 해는 짧지만,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시에 감사한다.

내 눈앞의 전선

너머의 말을 찾아다녔다. 가장 멀리, 가장 깊이 들어가보았다. 막연하였으나 얼마쯤은 만났다. 21년 전, 그때의 뜨거움을 다시 만난다. 이렇게나 많은 여자가 내 안에 복작대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숨을 곳이 없다. 2023년 여름 즈음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

걷지 않고 걸었다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나는 내가 희대의 사기꾼이 된 것은 아닌가 자주 되묻곤 했다. 그러나 이 땅에 엄연히 존재하는 길. 지도가 있으니, 지도가 생생하게 그 땅을 그려 들고 눈을 뜨고 올려다보고 있으니, 등고선 한 눈금도 예사로 누락시킨 채 거론할 수가 없었다. 지도는 기호로 말하는 세계다. 암벽을 건너뛰면서 밭 사이를 지나간다고 틀린 말을 할 수 없었다. 숲을 지나가면서 마을을 지나간다고 할 수 없었다. 옥수수가 잘 자라는 마을에서 벼가 익어간다고 할 수 없었다. 갈 수 없는 세계가 나를 볼모로 자신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깊은 사랑으로 바라보아 주기를 요구했다. 조림지, 전봇대, 산 상의 다락밭, 길 옆의 누옥, 산을 가로지르는 고압선 등등……. 무수한 사물들이 지도 위에서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생명을 얻어서 일어서며 나를 붙들고 걸어나오려 했다. 나는 그것들을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남겨 두고 그렇게 그리면서 백두산까지 걸어왔다. 걷지 않은 길을 걸었다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두께 1mm도 안 되는 종이 위의 세계, 뒤집어보면 백지에 불과한 지도에만 의지하여, '북한 쪽 백두대간' 910km를 헤치고 나오는 동안 내 등산화는 고요히 먼지를 쓰고 있었다. 2년여를 걸어와서 백두산 정상을 탈환했지만, 진부령에서 백두산까지 안개 속에 묻혀 있던 긴 구간을 이었지만, 내가 과연 그 길을 걸어왔던가? 내 등산화는 오히려 고요히 쉬고 있었다. 먼지만 잔뜩 쌓여서 우그러져 있었다. 내 이상은 한없이 높은 땅을 향해 달려갔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한 뜸 한 뜸 걷고 있었지만, 내 현실은 구겨지고 부서진 시간의 파편들을 짜깁기하느라, 안경의 도수만 높아졌다. 소설이라면 차라리 쉬웠으리라. 그러나 이 길에는 지도라는 명징한 근거가 있고, 지금 당장 갈 수는 없어도 실재하는 땅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무작정 상상의 날개를 달 수 없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더구나 그곳은 내가 사는 곳과는 체제와 이념이 다른 땅이다. 양쪽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않고, 양쪽이 공감할 수 있는 시점과 소재를 중심 축으로 삼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하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가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은 한 줄기며,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 이 찬란하고 눈물겨운 명분에서 한 발자국도 뒷걸음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다. 이제 내 책상 위에서 지도를 내려 놓는 순간이 왔다. 내 정신의 뜬구름을 내려 놓는 순간이 왔다. 매달, 매달, 맨몸으로 터널을 뚫는 것 같던 고통은 끝났다. 온몸에서 가시가 돋는 듯한 괴로움에서 가까스로 해방되었다.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인내하며 이 일에 그토록 매달려 있었던가? 이 길이 끝나기 전에 통일이 오기를 기대했지만, 행여라도 목을 빼고 기대했지만, 백두대간의 상반신을 겨우 이었을 뿐이다. 마지막 원고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내 눈시울은 나도 모르게 뜨거워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구겨진 지도를 내려 놓았다. 나 혼자 치르는 이 숭고한 의식. 숨어 있던 아픔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온다. 이제는 등산화의 먼지를 털어서 신고 다시 산으로 갈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너무 오랫동안 걷지 못했다. 내 주위에 막무가내로 쌓이고 널브러져 있는 이 첩첩한 자료들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흙 냄새를 맡아야겠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이제는 지도 위에서가 아니라, 내가 그린 백두대간, 네 잔등 위에서 실제로 숨쉬며 걸어 보고 싶다. 18회에 걸쳐 귀한 지면을 할당해 주신 월간 <山>에 감사한다. 내가 가는 길에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 드린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한 첫 말이, 이 연재를 끝내면서 하고 싶은 말이다. "백두대간은 한 줄기, 백두대간이 희망이다!" 실제로 갈 수 있는 날, 나는 이 책을 또 한번 쓸 것이다.

산아, 산아

산으로 간다. 직립하고 전진하고 상승하려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서고 걷고 오른다. 산은 시간의 집이다. 거기 가면 다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 등지고 떠나온 풍경들. 꽃과 열매를 주던 나무들. 피와 살같은 나무들. 꼼짝 않고 풍우를 견디는 바위들의 모습. 흙 밖으로 굽은 등이 드러난 나무 뿌리들. 그루터기만 남은 교목들. 썩어가는 나무 둥치. 그것들 위에 내리는 눈, 비, 돌멩이, 낙엽...... 그것들 위에 초록옷을 입혀 주는 이끼들의 속삭임. 물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오래 전의 사랑을 되살려 주는 자연의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면서도 늘 새롭다. 나는 거기서, 내 안에 종잇장처럼 압착되어 있던 말과 느낌들을 되살려 낸다. 나는 거기서 잊었던 숨을 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왔다.

야생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세웠으므로,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 나의 시, 나의 실천. 이루었거나 못 이룬 진수들. 미완성인 채로 언제 손을 놓아도 억울할 것 없을 포트폴리오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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