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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이신조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4년, 대한민국 서울

직업:소설가

최근작
2018년 11월 <다른 소년>

29세 라운지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성찰, 풍요롭고 향기로운 내면생활, 섭리에 대한 겸허, 운명에 대한 초탈, 진실한 영혼을 알아보는 진실한 눈, 그리고 아름다움. 그저 그것으로 충분한 것들. 물론 괴로움은 언제나 기본이고, 이 모든 것은 아직 나라는 인간의 과정일 뿐이다. 예의 한 단어가, 예의 한 문장이, 내게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그 간곡한 시간이 나는 좋다.

가상도시 백서

나는 모든 일이 일어났던 그 해를 생각했다. 그 해, 거창하게도 나는 사랑과 여행과 죽음을 한꺼번에 알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처음 알았기 때문에, 조금 알았고 많이 앓았다. 물론 거창하지 않았다. 무딘 스푼으로 심장을 파듯, 아프고 느리게 그것들이 나를 통과해갔다. 삶이 그저 '하나의 나쁜 습관'이거나, 어떤 '질병'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투정일까 견딜 수 없이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20대가 다 지나갔다.

감각의 시절

-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내게 ‘그 일’이 일어난 다음 날 새벽, 나는 내게 그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담요를 둘러쓴 채 몇 시간 전 껐던 티브이를 다시 켰다.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과거, 문학소녀였기보다 영화소녀였던 내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지 않았을 리 없다고, 적어도 두 번 이상은 봤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그 일이 일어난 다음 날 새벽, 나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보았다.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카렌(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 같은 거 말고, 축음기를 틀어놓고 모차르트 선율 속에서 둘이 춤을 추는 장면 같은 거 말고. 아프리카의 창공을 나는, 생텍쥐페리가 탔을 법한 옛날 비행기. 나도 저런 가죽 고글 써 보고 싶어, 나도 새들 위에서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싶어, 그런 생각하는 거 말고. 더 이상 소녀가 아닌 나는, 더 이상 소녀일 수 없는 나는 ‘그런 장면이 아닌 장면’을 보고 있었고, ‘그런 생각이 아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녀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 소녀일 때는 하지 못했던 생각. 나는 처음 본 게 아닌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매독균에 감염된 카렌이 케냐에서 고국 덴마크로 돌아가 1년 동안 끔찍한 치료를 받고 다시 케냐로 돌아오던 모습을, 데니스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 남편이 전해주자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그걸 왜 당신이 알려주는데?” 말하던 그녀의 눈동자를, 연인의 관 위로 끝내 흙 한 줌을 뿌리지 못하고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알게 되었다. 카렌 블릭센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아프리카에서의 16년을 뒤로하고 덴마크로 돌아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름 아닌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또 알게 되었다. 내게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과도한 감정 이입이나 비장한 동일시는 여전히 소녀적이랄 수 있겠다. 내가 매독에 걸렸다거나 내 연인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거나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메타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 내가 살았던 집 9동 404호. 나는 그 집에 4년 4개월간 살았다. 그 집은 1971년에 지어진 집이었고, 나는 그 집에 살았던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좁은 집이었다. 좁은 방이 있었고, 좁은 욕실이 있었고, 좁은 베란다가 있었고, 좁은 침대와 좁은 옷장과 좁은 식탁이 있었다. 좁은 집이었지만, 그것이 다인 집은 아니었다. 4년 4개월, 감각의 시절이었다. - 1973년의 핀볼 나도 ‘208’ ‘209’ 쌍둥이를 데리고, 차를 몰고, 비가 내리는 먼 저수지로 배전반을 장례 치러주러 가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어서,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흐린 오후에, 배전반 대신 다른 것을 가지고 시간의 정원으로 갔다. 208, 209 쌍둥이처럼 A와 B를 데려왔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처럼 셋이 세 종류의 쿠키를 불공평해지지 않도록 정확히 삼 등분해서 먹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말했을 것이다. “쿠키와 비스킷이 어떻게 다른 건지 알아?” 마지못해 B가 먼저 입을 열었을 것이다. “뭐 그런 거까지 알아야 돼?” 끝내 입을 다물고 있으려던 A가 말했을 것이다. “난 단 거 안 먹는다.” 쿠키와 비스킷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B와 단 것을 먹지 않는다는 A와 쿠키와 비스킷을 구분할뿐더러 단 것을 꽤나 좋아하는 나. 그 때문에 우리가 쿠키를 삼 등분해서 나눠 먹는 일이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말한 A와 B가,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쿠키와 비스킷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으리란 것이다. 나는 아마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개미와 코끼리만큼은 아니겠지만, 쿠키와 비스킷은 개미와 벌만큼이나 달라. 각각 거느리고 있는 우주가 다르다고······” A는 계속 단 것을 먹지 않겠지만, B는 계속 쿠키와 비스킷을 구분하지 않겠지만, A와 B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했을 것이다.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내가, 그런 것을 구분하는 내가 좋았던 것이므로. 돌이켜보면, 아닌 척, A와 B는 나를 꽤 잘 따랐다. 과연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단 것은 몸에 좋지 않지만, 쿠키와 비스킷은 다르다. 엄연히 다르다. 나는 배전반 대신 가져간 푸르스름한 빛깔의 작은 유리 재떨이를 시간의 정원 연못 속으로 힘껏 던졌다. 불가사리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한, 삼각형의 유리 재떨이, A와 B가 알고 있는 유리 재떨이. 소설에서처럼 칸트를 한 구절 읊어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무튼 쿠키와 비스킷은 다르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섬세하지 않고, 나는 아직 세상의 경이롭고 위대한 섬세함을 모두 발견하지 못했다. -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이제 휴대폰 전화번호부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기에 알게 된 사람들의 번호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번호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다행일까, 다행일 것이다. 정말 얼굴이 너무나 환하더라는 그런 꿈을 대신 꾸어준 언니 현영, 사려 깊고 배려 깊은 친구 지민, 추운 날 함께 오래 기다려준 동생 선화, 세 벗들에게 각별한 사랑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문학과지성사 식구들, 해설을 맡아주신 권오룡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기껏 스물둘 혹은 스물셋, 그때, 굳이 그 구절을 중얼거릴 필요가 없었던 그때, 애써 좋아할 이유가 없었던 그때, 아직 멀었음에도, 어림없었음에도, 그 구절이, 그 시가, 그 시집이 너무나 좋았다. 더 이상 내가 젊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이제 분명 청춘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 일찌감치 좋아했던 그 구절을 자연스럽게 중얼거릴 수 있다. 나쁘지 않다. - 잘 가라, 내 청춘 2010년 5월

기대어 앉은 오후

결국 나는 작가가 되었다. 나는 작가다,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를 소설로 이끌던 어떤 자석 같은 힘. 그 피동형의 변명이 나를 조금은 예의 미안함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간신히 물음 하나를 가졌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답을 좇는 내 질문이 집요하길 바란다. 지난봄, 신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삶은 쓸 때만 공포스럽지 않았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몇십 년씩 글을 쓴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근사한 뮤직 비디오의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수상 소감' 중에서)

다른 소년

원(圓), 지난 이십 년,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감히 원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미처 알지 못한 채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원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 원들이 어째서 그런 것들이었는지, 어디로 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메아리 같은, 비눗방울 같은, 빵 반죽 같은, 그릇 같은, 살구 같은, 고양이의 동공 같은, 아주 가끔은 만다라 같은, 그런 동그라미들…… 예전 그때처럼, 다시 가을이 왔다.

책의 연인

이 책을 씌어지고 만들어진 지난 시간에 과연 이 책도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 있는가가 미리 정해졌는지 어쩐지는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책을 읽는 그 누군가가 나의 연인인 그를, 그의 연인인 나를, 나와 그의 사랑을, 깊이 질투해주었으면 좋겠다. 파스칼 키냐르는 썼다, 책에 썼다 - 사랑하다, 즉 책을 펼쳐놓고 읽다.

패션의 여왕 코코 샤넬

사람들은 살아가며 차츰 깨닫는다.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바로 ‘나다움’이란 것을. 스스로의 ‘나다움’을 발견하고, ‘나다움’으로 갈등하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극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나다움’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끝내 ‘나다움’으로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우리 모두는 ‘나다운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위인은 언제나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샤넬의 패션이 그러하듯 샤넬의 삶은 우리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영감을 준다. 이 책에 소개된 샤넬의 삶이 독자 개개인의 ‘나다움’을 찾는 일에 작은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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