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지은이)의 말
우리는 어려부터터 부모에게, 자라서는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항상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라'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배우고 그렇게 살도록 다짐받는다. 하지만 그 잘난 중용이나 균형이란 것을 잘못 취하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지지 마라'고 주의받던, 바로 그 극단에 가 있는 수가 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이며,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다. 이런 식으로 중용을 추구하다보면, 어느 사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존경받던 어른들이 어쩌다 우리의 실망을 사는 경우는 바로 그 사안에서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중략)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 책에 실린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한국 사회가 내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자 했던 작은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공부의 내용들은 그야말로 하나의 시안에 불과하고,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감히 <장정일의 공부>라는 제목으로 내놓는 것은,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 하고' 그 다음에는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 하면 당신이 할 게 뭐 남아 있겠는가? 그래야 당신이 '조금하다' 지치면 내가 이어서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을 읽어줄 젊은 독자들이, 내가 이 책에서 다룬 주제와 내용을 보고 나서 '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봐야지' 하고 발심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