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촉발시킨 보부아르는 프랑스 파리의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세가 점차 기울어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원망 섞인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보부아르는 아버지에 대해 적대시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지식을 좇게 되었지만 부모님이 지시하는 '상류계급 아가씨'로서의 몸가짐도 따르지 않으면 안 됐다. 때문에 낡은 인습과 새 시대 자유로움의 괴리는 고독을 불러 왔다.
사르트르와의 만남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녀에게 탈출구가 된다. 더욱이 보부아르는 가족들의 비난과 단절에 스스로를 사생아 같다고 여겼으므로 그 만남은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서로의 연애와 사상을 격려하거나 조언하며 동반자로 지냈다.
보부아르는 소설가를 지망하고 여러 작품을 발표했지만, 정작 그녀의 지적 사상과 업적이 빛난 것은 철학 분야였다. 아무래도 사르트르 철학의 흔적이 묻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나름의 체계에 따라 명료하고도 과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제시한다.
수상 :1954년 공쿠르상 최근작 :<아주 편안한 죽음 (리커버)> ,<초대받은 여자 2> ,<초대받은 여자 1> … 총 315종 (모두보기) 소개 :1908년 프랑스 파리, 가톨릭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부유하던 어머니 쪽 가문이 파산하면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지만 아버지의 기대 속에 명문 학교에서 수학한다. 일찍이 학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보부아르는 15세 무렵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특히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장폴 사르트르, 폴 니장 등을 만난다. 이때 인연을 맺은 사르트르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계약 결혼’이라는 파격적인 형태로 한평생을 함께한다. 1929년, 보부아르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단번에 차석으로 통과하는데, 당시로서는 최연소이자 여성으로서는 9번째 합격자다. 이후 그는 여러 고등학교에서 12년 동안 철학을 가르치지만 1942년에 교편을 내려놓는다. 1943년,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보부아르는 소설 『초대받은 여자』와 1944년 실존주의 윤리학의 단초를 마련한 『피뤼스와 시네아스』 등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 철학 잡지 《현대》를 창간한다. 그사이 소설, 희곡, 철학서, 회고록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던 보부아르는 마침내 1949년,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준 『제2의 성』을 출간한다.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문제를 고찰한 이 저서는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프랑스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1954년 장편 소설 『레 망다랭』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이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철학자, 페미니즘 사상가, 소설가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1970년대 여성 해방 운동(MLF)에 적극 참여하며 여성과 관련한 법과 제도를 개혁하는 데 앞장선다. 1970년 나이 듦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노년』을 펴내고, 1972년 그간의 자서전을 결산하는 『요컨대』와 1981년 사르트르의 말년과 죽음을 회고한 『작별의 의식』을 발표한다. 1986년 폐렴으로 타계한 보부아르는 선구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페미니즘 사상가로서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최근작 :<바빌론 탈무드 (케이스 포함)> ,<카발라 탈무드 (케이스 포함)> ,<카발라 탈무드> … 총 34종 (모두보기) 소개 :성균관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파리사회과학고등 연구원 EHESS 역사인류학 박사과정 수학. 지은책 《솔로몬 탈무드》 《바빌론 탈무드》 《카발라 탈무드》, 옮긴책 베르그송 《웃음》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미엘 《아미엘 일기》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사르트르 《구토》 《말》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철학 강의》 《신을 기다리며》 등이 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의 경전!
출간 이후 여성해방혁명 일으킨 페미니즘 선구 보부아르!
떠오르는 여성, 몰락하는 남성
현대는 ‘유니섹스’라는 단어로 정의될 만큼 남성과 여성의 성 구분이 없어지는 시대다. 이러한 경계의 붕괴는 패션이나 갖가지 직업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거리에 나서면‘여자 같은 남자’와 ‘남자 같은 여자’를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겉모습이 서로 비슷해지는 것만큼 그들의 사회적 위치도 비슷해져 가고 있을까? 각종 매스컴에서 지칭하는 것처럼 과연 우리는 ‘여성상위시대’를 살고 있는가. 그런데 알다시피 사회의 한편에서는 각종 여성운동이 활발하다. 그것은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규제와 사회적 금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남성 몰락의 시대’라는 표제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남성은 어느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몰락’하게 되는 것일까. 그들이 내려앉은 위치는 여성의 눈으로 보았을 때 높은가 낮은가. 혹시 몰락이 아니라 동등해지는 것에 지나지는 않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는 의문일 것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에 비해 적은 급료를 받고, 출산이라는 덫에 꿰여 금전과 커리어의 손실을 입을 때면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촉발시킨 보부아르는 프랑스 파리의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세가 점차 기울어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원망 섞인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보부아르는 아버지에 대해 적대시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지식을 좇게 되었지만 부모님이 지시하는 ‘상류계급 아가씨’로서의 몸가짐도 따르지 않으면 안 됐다. 때문에 낡은 인습과 새 시대 자유로움의 괴리는 고독을 불러 왔다.
사르트르와의 만남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녀에게 탈출구가 된다. 더욱이 보부아르는 가족들의 비난과 단절에 스스로를 사생아 같다고 여겼으므로 그 만남은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언제나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서로의 연애와 사상을 격려하거나 조언하며 동반자로 지냈다.
보부아르는 소설가를 지망하고 여러 작품을 발표했지만, 정작 그녀의 지적 사상과 업적이 빛난 것은 철학 분야였다. 아무래도 사르트르 철학의 흔적이 묻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나름의 체계에 따라 명료하고도 과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제시한다.
‘초월’하는 인간이 행복하다
보부아르에게 인간의 자유란, 인간이 대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투기하며 현재의 나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활동성을 통해 이룩된다. 정지된 채 투기를 멈춘 인간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무의미할 뿐이다. 무의미한 것은 따분함과 불안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투기를 완성한 인간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중요한 것은 투기의 완성이 아니라 투기하는 행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투기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계속되는 완성 속에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
투기의 목표는 인간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에 앞서거나 인간 없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치 따위는 없다.
인간성이란 어떤 신성한 것이 아니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인간성은 바로 ‘끊임없는 초월’이라고 볼 수 있다. 보부아르에게 인간성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현재 행해지는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리고 인간 자유의 가치는 매순간마다 자기를 존재하게 하려는 노력 속에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현재의 젊음을 잃더라도 새로운 투기 대상을 발견할 것이며 또 다른 삶의 보람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인간의 자유란 언제나 고독하며, 자신만이 스스로를 짐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나를 존재하게 하는 타인이란 무엇인가.
헌신하는 인간에게 타인이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시하고 타인에게 기대어 산다. 헌신이란 자기 앞에 절대 목적을 놓음으로써 자기 자유성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적 도구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이 자기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자신이 베푼 희생이 짓밟혔다고 여긴다. 자기 목적과 타인의 목적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헌신이 ‘자유로운 증여’의 성격을 띠기 위해선 증여받는 상대 또한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 이럴 때만 타인의 자유와 만나는 자신의 자유가 실재성을 띤다. 그리고 자유와 자유의 만남은 다른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의 모습을 보인다.
자유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타인이 나의 초월성을 따르기 위해선 같은 길, 같은 지점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유를 향한 투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내 자유의 전진운동에 의해 나를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이 나의 ‘초월성을 따라올 수 있거나, 추월할 위치를 그들을 위해 열어주는 노력’이다.
곧 타인은 내 존재를 물(物)화하지만 나에게 자유를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가 타인에게 존재할 수 있으려면 타인이 나를 자유로운 인격이길 바라야 한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타인이 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타인에게 나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자유와 자유의 관계는 상호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유롭길 원하는 여성은 초월과 투기,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 하며, 남성이 여성을 의존상태에서 해방할 때만이 진정 여성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