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이제껏 오독되어왔다. 왜냐하면 공자를 샤먼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실제의 논어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애니미즘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논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인과 예, 군자와 소인 같은 개념을 재정의하는 한편, 공자 본연의 사상을 재구축하고 동아시아의 고층에 자리잡은 정신풍토를 추적하고 있다.
이현우 (서평가,『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 새로 읽는 논어, 다시 만나는 공자
『논어』 2천 년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전복적 해석
“행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時)이다”
왜 공자는 ‘때’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이제껏 우리는 공자를 오해해왔고 『논어』를 오독해왔다
한·중·일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공자 이해에서 완전히 벗어나,
후대의 해석으로 본 공자가 아니라 공자 그 사람의 세계관에 다가선다!
논어는 이제껏 오독되어왔다. 왜냐하면 공자를 샤먼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논어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애니미즘〉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삼라만상에 생명이 깃든다는 세계관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생명〉이 드러난다는 사상이다. 이 책은 논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인과 예, 군자와 소인 같은 개념을 재정의하는 한편, 공자 본연의 사상을 재구축하고 동아시아의 고층에 자리잡은 정신풍토를 추적한다.
기존 통설을 뒤집으며 『논어』를 수미일관하게 재해석
공자라는 철학자는 무엇을 말한 사람이었을까? 이 책은 중국·한국·일본에서 이루어져온 기존의 해석과 달리, 완전히 새롭게 공자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키워드는 〈애니미즘〉이다. 저자는 『논어』의 세계관에는 〈애니미즘〉의 색채가 짙다고 본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애니미즘〉이 새로운 해석의 출발점
저자는 우선 〈애니미즘〉에 주목한다. ‘공자의 세계관’은 맹자와 달리 성性(인간성)과 천天(초월성)을 한데 묶지 않는다. 초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이나 낯빛, 날짐승과 들짐승의 울음소리, 다양한 것들이 서 있고 움직이는 방식 등을 중시하고, 형용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공자가 죽은 뒤 맹자 시대쯤부터 이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도전을 받았고, 마침내 파괴되어버렸다. ‘성과 천’을 직결시켜, ‘인간’을 초월성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게 되었다. 그 완성형이 『맹자』와 『중용』이라고 저자는 본다. 송대 이래의 중국, 그리고 조선왕조 이래의 조선에서는 『맹자』적 세계관이 거의 모든 것을 지배했고, 또 주자학 이래로 『논어』를 『맹자』적으로, 즉 〈범령론〉적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리고 공자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논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그러나 『논어』의 본래 모습을 복원해보면, 주자학 이후의 독법과는 전혀 다른 〈애니미즘〉적 세계관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애니미즘〉, 〈범령론〉, 샤머니즘
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즉 〈애니미즘〉과 〈범령론〉에서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범령론〉을 ‘범신론’이라 해도 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신神’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범령론〉이라 부른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靈(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큰 의미에서는 〈범령론〉인데, 동양에서는 ‘기氣 사상’이 대표적인 〈범령론〉이다. 왜냐하면 ‘기’라는 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나 넋을 포함한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 등의 기 사상은 〈범령론〉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전제한다. 또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역시 자주 혼동되지만 전혀 다른 사상이라고 저자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샤머니즘은 ‘하늘(天)’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믿고, 하늘과 지상地上을 매개하는 샤먼이 지상에 군림한다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샤먼은 하늘의 대리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공자가 『논어』 곳곳에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다면서, ‘군자’를 〈애니미즘〉적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소인’을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소유자라고 본다. 그러면서 소인은 모든 것을 ‘하늘’의 보편적 가치에서 연역演繹하여 세속사회에 적용하려 들지만, 군자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 따위를 무조건 믿거나 하지 않는다고 양쪽을 구별한다.
공자와 『논어』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키워드, 〈제3의 생명〉
이 책에서 저자는 〈제3의 생명〉이라는 말을 제시한다. 이것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사람들이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명관이다. 저자는 상이한 차원의 다양한 생명관을 인류정신사에서 추출하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제3의 생명〉이라 부르는데, 〈제3의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도 종교적 생명도 아닌, 〈애니미즘〉에서의 생명관이다. 〈제1의 생명〉이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고, 〈제2의 생명〉이란 정신적·종교적 생명이다. 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도 흔히 ‘도덕’이나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파악한다. 즉 공자의 ‘인’은 〈사이의 생명〉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자적 〈애니미즘〉 역시 〈제3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에 비해, 〈범령론〉은 〈제2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 책에서 〈범령론〉은 세계(우주)에 하나의 보편적이고 비육체적인 생명이 가득하다고 보는 사상 일반을 가리킨다. 애니미즘이라는 단어는 흔히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키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관共同主觀에 의해 〈생명〉을 문득 드러내는’ 세계관을 괄호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이런 〈애니미즘〉을 보통의 애니미즘과 구별하기 위해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공자 이후의 사상
저자가 해석하기에, 공자의 이러한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씨족사회나 향당사회가 무너지고 강대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한 공자의 세계관을 혐오하던 세력은 보편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채택했는데, 그것이 도가에서 맹자, 순자, 법가로 이어지는 계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도가’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귀납적인 〈애니미즘〉이 아니라 〈범령론〉적인 ‘도道’라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상집단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공자 학단의 후예이면서 도가의 영향을 받은 맹자는 유가의 세계관을 크게 바꿔버렸고, 공자와 같은 귀납적 방법론을 버리고 도가에서 배운 연역적 방법론을 과감하게 펼쳤는데, 그것이 인의仁義라고 본다. 중국에서는 그뒤 공자의 〈애니미즘〉적 생명관과 도가나 맹자의 〈범령론〉적 생명관이 길항하다가 마침내 〈애니미즘〉적 생명관은 망각되었고,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말도 어느 사이엔가 의미가 분명치 않은 어떤 것이 되어버렸으며, 이후의 주자학과 양명학은 〈범령론〉적 생명관의 완성형이라고 지적한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군자’의 참모습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군자’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사람이나 교양인이 아니다. 그저 ‘아무리 비천한 일일지라도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최고의 〈생명〉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위정」)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천 년 동안에 이 대목을 ‘군자는 그릇처럼 특정한 용도가 미리 정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군자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왔는데, 이 말의 핵심은 오히려 군자는 특정한 일에서만 인仁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구별 없이 모든 일에서 ‘인仁이라는 〈사이의 생명〉’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저자는 달리 해석한다. 저자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군자는 제너럴리스트이다’라고 해석해버리면, 마치 군자는 개개의 특수한 일에서는 스페셜리스트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훗날 맹자가 ‘대인大人’이라는 개념으로 도덕적 제너럴리스트를 정립한 것에 영향을 받은 ‘군자 해석’이다. 또한 유자들이 황제의 관료로서 통일제국의 정치·행정·사법을 한 손에 담당했던 시대에 자기들을 도덕적인 반反스페셜리스트로 규정하고 싶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해석이었다. 유교사회에서 기술자를 멸시하게 된 근원인 것이다.”
「향당」 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왜 공자는 ‘때’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인’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흔히들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해온 「향당」 편의 한 대목(色斯擧矣, 翔而後集.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별도의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내 번역은 다음과 같다.
공자 일행이 길을 가는데, 인기척을 느낀 암꿩이 하늘로 날아올라 한참 있다 나무에 앉았다. 선생은 말했다. “산기슭의 암꿩은 때를 아는구나. 때를 아는구나.” 이 말을 듣고 자로는 꿩에게 먹이를 주어보았다. 그러자 꿩은 먹이를 세 번 냄새 맡고 날아갔다.
즉 공자는 꿩이 ‘때’를 알고 있음을 상찬했다. 인간의 출처진퇴에 비겨서 생각해도 좋을 이 대목은 좀더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논어』 개권 제1장에서 ‘배워서 때로 이것을 익힌다(學而時習之)’고 할 때의 ‘습習’은 바로 새끼새가 날갯짓을 하며 날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새끼새가 많은 학습과 경험을 쌓아, 이 「향당」 편 최종장의 꿩이 되어 ‘날아오르고(翔)’ 있는 것이다(습習과 상翔의 대비). 처음에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생명〉의 실천이지만, 오랜 기간의 숙련을 통해서, 반성지反省知를 매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명〉의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재시재時哉時哉(때이구나, 때이구나)”인 것이다.〉 _본문 205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