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망각되었던 해방 정국의 유교계의 동향을 최초로 복원하여, 구한말 의병전쟁부터 196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진 유교 정치 이상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사료 발굴을 바탕으로 해방 정국의 좌우 유교 단체 참여자 조사와 분석 작업을 수행하여 유교 정치운동사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
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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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7년 4월 20일자
최근작 :<서재필 평전> ,<민주주의의 탄생> ,<군자들의 행진> … 총 6종 (모두보기) 소개 :충북 보은 출생.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전강독 모임 작은대학(1기)을 수료했다. 대학 재학 중 『세계의 문학』에 ‘푸른 별’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언어세계』에 평론 ‘5·18 시의 문학사적 위상’을 발표했다.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진학하여 “‘5월시’의 사회적 형성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근대 한국의 윤리적 개인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연구: 정인보, 함석헌, 백석, 윤동주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논문을 축약한 “5월시의 사회적 형성”이 『5월문학총서 4 - 평론』에 실렸다. 작은대학 총무교수, 독서대학 르네21 기획위원을 맡아 독서.교육운동에 힘썼고, 현재는 한국사회이론학회 총무이사.편집위원,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학술상(2017)을 수상했다.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2007), 『군자들의 행진 -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민주화운동』(2017), 『민주주의의 탄생 - 왜 지금 다시 토크빌을 읽는가』(2018) 등의 단독 저서를 냈고, 『한국의 사회개혁과 참여민주주의』(2006), 『유종호 깊이 읽기』(2006), 『뒤르케임을 다시 생각한다』(2008), 『납북민족지성의 삶과 정신』(2011) 등의 공동 저서를 냈다.
이 책은 그동안 망각되었던 해방 정국의 유교계의 동향을 최초로 복원하여, 구한말 의병전쟁부터 196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진 유교 정치 이상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사료 발굴을 바탕으로 해방 정국의 좌우 유교 단체 참여자 조사와 분석 작업을 수행하여 유교 정치운동사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있다. ‘전통과 근대’, ‘유교와 민주주의’ 등의 형이상학적 논전(論戰)의 수렁을 우회하여, 경험 수준에서 유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 대해 접근했다는 점은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 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4·19 혁명을 완성시킨 4·25 교수단 데모에 유교 네트워크가 있었다.
1960년 4·19 학생 시위를 혁명으로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4월 25일의 재경 교수단 데모였다. 이들은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선거 무효 등을 외치던 기존의 소극적 주장에서 벗어나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 대통령이 다음날 하야 약속을 하면서 건국 이후 최초의 시민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단 데모의 기획과 진행의 핵심에 유교 지식인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존의 현대사 서술은 간과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민주화운동사가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외래종의 신념 체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관념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유교인 스스로 의병전쟁과 파리장서운동 이후의 현대 유교사를 쇠락의 시기로 부끄럽게 여겨 연구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4·25 교수단 데모를 주도한 이상은, 권오돈, 임창순, 이정규, 조윤제, 이희승, 한태수 등이 심산 김창숙을 정점으로 한 옛 유교계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유교계 건국운동 및 통일국가수립운동의 전통에 이어져 있다는 주장, 곧 유교계 정치운동의 연속성 논증을 실제 유교 중심의 근현대사 분석을 통해 학계와 독자들에게 최초로 선보인다.
구한말 의병전쟁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연속성을 논증하다
유교는 조선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식민지 시기 내내 비판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변화를 거부하고 소멸되어 가는 전통 종교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는 절반만큼만 사실이다. 국망 전후 일제의 침략에 맞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집단은 정통 유림 세력이었다. 일제의 이른바 ‘대토벌’에 의해 사상자만 수만에 이르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 학맥의 후예들과 개신 유림들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통해 재집결하여 의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파리장서운동 생존자와 그 후예들은 김창숙과 정인보를 중심으로 유도회총본부로 결집하여 해방 정국에서 자주적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했다. 의암 류인석,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등 구한말 의병전쟁과 일제하 독립운동 참여 세력의 후손과 학파 유림들 대부분이 참여한 유도회총본부는 유교 정치 이상의 실현과 유교계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분투했다. 여기에는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이회영을 따랐던 아나키스트 세력들도 결합했다. 한편, 유교계의 청년 세력들은 대동회와 전국유교연맹을 각각 결성하여 좌파의 통일국가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책에는 구한말에서 해방 정국까지 유교계의 민족운동과 정치운동의 계통을 총괄 정리한 그림이 562~563쪽에 실려 있다. 첨부 자료 참조.) 이러한 유교계의 정치운동은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중요 인물들의 사망과 납북으로 타격을 받았고, 이승만의 독재화에 김창숙 중심의 유교계가 저항한 까닭에 정권 차원의 탄압을 받으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교계 지식인의 네트워크는 4·19혁명 전후에 다시 활성화되어 교수단 데모를 조직화하여 마침내 시민혁명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네트워크는 해방 이후 김창숙에 의해 다져진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 정국에서 진보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섰다가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었지만,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 시기 ‘재경유림단 성명’을 발표하는 등 유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바지했다.
유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유교민주주의론을 혁신하다
그동안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근대, 또는 유교와 민주주의의 친화력 여부에 대해 치열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 논쟁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수준 너머로 발전되기 어려웠다. 찬반 당사자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저의에 의심을 품었고 다음 단계에서는 경험의 차이가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유교 문화권 국가의 불완전하거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경험적 차이를 완화시킬 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 형성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일반 이론 대신 구체적 ‘민주화’에 주목했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경험적 논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 유교사는 이에 대한 확실한 논거를 제공한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유림 주도의 의병 세력은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근대 민족주의에 눈을 뜨며 역설적으로 유교 혁신을 통해 근대적 전환을 이뤘고, 해방 이후 그 후예들은 근대적 정치 제도 하에서 민본의 이상을 민주주의로 전유하여 건국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유교사의 저력에 맞물려, 사회 구성원이 유교적 가치와 언어에 익숙해 있던 1960년대까지 유교는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인적·사상적 자원을 제공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근현대 유교 정치운동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경험 수준에서 유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 대해 접근했다는 점이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이다.
한학자로만 알았던 이들, 사실은 불굴의 투사였다
일제강점기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 교육 체계에서 배제된 전통적 유교 지식인들은 차츰 한학(漢學)이라는 비정치적 영역에 강제로 갇히게 되었지만, 정인보와 조선학운동으로 대표되는 일제하 민족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주의 정치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성장한 청년 유교인들은 독립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상운동에 참여했고 그 연속선에서 해방 정국의 정치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책은 오늘 우리가 ‘한학자’ 또는 고전번역자로만 알고 있었던 지식인들이 사실은 유교계 정치운동의 적극 참여자였다는 것을 밝혀 독자들에게 알린다. 노론 가문 출신의 권오돈은 청년 시절부터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불굴의 투사였고, 이민수(이석구)는 해방 전 이육사와 교유하고 해방 이후 사서연역회에 참여하던 중 전국유교연맹의 총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오늘날 국학이나 유학 분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서가에는 반드시 이들에 의해 번역된 유교 경전과 한국사 고전 서적이 꽂혀 있다. 지곡서당(이후 태동고전연구소로 개칭)에서 한학의 맥을 잇는 제자를 양성했던 임창순 역시 해방 정국과 민주화운동 시기의 지사로서 고초를 겪었고, 성낙훈은 약관에 신간회에 참여하고 해방 후 우파와 중도파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했었다. 조규택은 임정 요인으로 해방 후 귀국하여 유교계의 임시정부봉대운동을 주도했던 조성환의 아들이었는데, 조봉암의 진보당에 참여해서 고초를 겪었다. 그 밖에 일제하 정인보, 김태준 등 유교 명사들의 영향하에 있던 청년 유림들의 다수도 좌우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변화된 정세와 유교의 쇠락이라는 조건 때문에 이들은 한학이라는 비제도적 학문 영역으로 활동이 제약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유교 지식인들은 정치와 학문의 일체로서 유교 정치 이상을 현실화하고자 분투했음을 이 책은 특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