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두려움을 체험하는 것이며, 악행이란 타자를 상처입힘으로써 타자가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면서 자신은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공포, 혐오, 악 이 세 가지는 태생이 같은 세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갖추고 살기가 지독하게 힘들어지는 이 시대, 우리의 내면에서 낯선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공포와 그것이 극대화되어 악으로 전환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틀과 관점으로 타자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 난 죽음과 노화에 대한 공포를 바라볼 것이며,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성별화된 신체라는 인간의 조건과 숙명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윤리와 미학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 속에서 공포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 이 시대야말로 공포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천착을 통해 현재, 우리의 행태에 대한 성찰과 돌아봄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범람하는 공포와 혐오의 한편에서 가능할 수 있는 인간의 성별화된 조건과 신체성, 그리고 타자의 문제를 새로운 프리즘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다.
최근작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과 위험성> ,<시각의 폭력> ,<공포의 철학> … 총 6종 (모두보기) 소개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4대학 철학사과에서 베르그손 연구로 DEA 학위를 받고, 파리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여성철학과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있으며,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달과 나무’ 객원연구원, 《여/성이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공포의 철학: 타자가 지옥이 된 시대를 살다》(2017), 《시각의 폭력: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2021)가 있고, 옮긴 책으로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2006)이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갖추고 살기가 지독하게 힘들어지는 이 시대,
우리의 내면에서 낯선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공포와
그것이 극대화되어 악으로 전환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틀과 관점으로 타자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혐오, 공포, 악의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
지금 대한민국은 병적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2017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병적인 공포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곳곳에 퍼진 포비아 현상을 보고 있다. 이러한 혐오의 정서는 미디어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고 확산된 혐오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다시 공포의 감정으로 이끈다.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도태되어야 할 벌레들이라는 논리 속에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선한 행동은 조롱받고 짓밟힌다.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조롱과 야유 속에서는 최소한의 배려와 윤리의식이 배제된 ‘악’이 탄생한다. 다시 말해, 내 몫을 부당하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도축장과 같이 무한 경쟁 속에서 피폐해지고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극한의 스트레스에서 나보다 취약한 타인에 대한 혐오가 나오고 이 혐오는 새로운 악의 모습을 띤다.
어쨌든 누나의 죽음을 통해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그때가 조금 늦을 뿐이지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라가리라는 걸 확인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아직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죽음’이 주는 추상적인 공포보다는 아파트 대출금, 카드 빚, 결혼, 아이의 탄생과 더불어 더욱 옥죄어 오는 노동의 고통과 생활고, 그리고 이 노예선에서조차 밀려나면 어디 빌어먹을 데도 없는 신세에서 오는 생활의 공포가 너무나 크다. 그리고 나. 나는 무엇을 하는 건가? 다니던 직장을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둔 이후로 잡다한 알바를 하며 생활을 연명하는 나는, 노예선에 승선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남들이 흘리는 빵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다니는 짐승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화두가 떠오르면 숨이 막히곤 한다.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죽은 누나가 부럽다.
-1부 프롤로그 중에서
벌레들의 시대
지금 벌레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2017년 현재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 벌레들이다. 처음에는 몰상식하고 민폐를 끼치는 집단에 대한 혐오와 폄하의 표현인 ‘~충’이라는 표현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주는 집단, 혹은 나와는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갖는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데 쓰이면서 온갖 벌레들이 범람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는 엄마들은 ‘맘충’, 자전거를 타고 도로에 나오면 ‘자전거충’, 대학 수시 전형 입학생들은 ‘수시충’, 토익 공부에 매달리면 ‘토익충’, 아르바이트생들은 ‘알바충’, 지방에 살면 ‘지방충’이 된다. 그 외에도 자식을 버릇없이 키우는 애비충, 맥락에 안 맞게 진지한 말을 하는 진지충, 담임충, 좌좀충, 우꼴충, 노인충 등 벌레충은 온갖 집단에 붙여질 수 있다. 그러나 헬조선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벌레들을 제외한 상위 1퍼센트에게 ‘~충’자를 붙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말하자면 흙수저들끼리의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흙수저들끼리 경쟁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이에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끼칠 것 같은 사람들이나 집단은 철저하게 배격하고 혐오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은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모멸감, 그 위에 덧붙여지는 나와 다른 타자를 인정과 관용으로 감싸기보다는 혐오의 감정으로 차별하려는 정서.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 사회를 강타하는 정서가 다름 아닌 ‘혐오’가 되었을까?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혐오란 “어떠한 것을 공포, 불결함 따위 때문에 기피하는 감정[정서]으로, 그 기피하는 정도가 단순히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닌 감정[정서]을 의미”한다. 벌레는 인간에게 공포감과 동시에 불결함을 불러일으켜서 옆에만 있어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기피하는 대표적인 존재다. 혐오라는 부정적인 정서는 혐오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혐오하는 주체에게도 내면적으로 매우 불쾌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서다. 이처럼 주객을 모두 엄청나게 피폐하게 만드는 정서가 현재 우리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뉴스 기사를 도배하다시피 한 갖가지 살인과 폭력 사건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나 전 여자친구를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부모가 어린 자식을 폭행하고 방치해서 살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들.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혹시 죽여야 할 만큼의 분노를 일으키는 상대방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각종 혐오는 대표적인 혐오 대상인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사회적 약자들인 성소수자, 장애인, 이방인, 심지어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겪은 유족들에게까지 그 불똥이 튀고 있다. 2014년 가을, 단식 농성을 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행한 일베의 행동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난무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했다. 이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들은 혹시라도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박탈감에서 오는 자기멸시를 타자에게 투사하는 것은 아닐까?
혐오 속에 내재된 공포
공포와 혐오. 일견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사실 이 둘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공포라는 감정은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혐오는 공포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대개 역겨움의 대상은 오염물이고 혐오는 오염된 대상과의 “원치 않는 가까움”을 거절하는 감정이라고 본다. 배설물, 콧물, 정액, 생리혈 등 인간의 신체 분비물은 거의 대부분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간주되며, 이것을 섭취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러한 신체 분비물들과 접촉하는 사람은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중반, 한국 여성을 비하하던 혐오 발언에 내포하는 남성들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 ‘개똥녀’, ‘된장녀’, ‘김치녀’ 등 ○○녀를 특징짓는 자극적인 단어들은 혐오를 유발하는 후각, 촉각, 미각의 메커니즘을 잘 활용하여, 여성을 폄하하고 비하한다. 끈적거리고 냄새나고 시큼한 이들 여성들은 정상적이고 개념에 차 있다고 상정되는 남성 주체로부터 거리를 두고 혐오해야 할 그 어떤 무엇이다. 앞서 말했듯이, 2000년대 중반에 난립하던 이들 수많은 ○○녀들이 ‘김치녀’로 통합된 데에는 어떤 심리적 이유가 있을까? 김치녀로 통합되는 한국 여성들뿐만 아니라, 일본 여성을 ‘스시녀’라고 부르면서 왜 유독 여성을 먹을 것과 관련시켜 비하하는 데 이를까? 물론 여기에는 김치와 된장과 같은 자국민의 발효식품이 저열한 음식에 속한다는 독특한 한국만의 사대주의적 발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물 혐오와 여성혐오는 현재 한국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없고, 그 연원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문화권에서 매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특히 많은 음식물을 접해보지 못한 유아기나 아동기에 심리적인 음식물 혐오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음식물 혐오에 대한 심리적 연원에 대해 추적한다. 그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을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대항하는 존재의 격렬하고도 어렴풋한 반항”이라고 정의내린다. 음식물이나 더러운 것, 오물에 대한 혐오감과 그로 인한 근육의 경련이나 구토는 그런 더러운 것들과 경계 지우고 나를 멀어지게 하고 피해가는 아브젝시옹의 과정이다. 이 중에서도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형태의 아브젝시옹이다.
공포란 무엇인가
공포는 라틴어 ‘안구스투스(angustus)’에서 유래하는 압박 또는 구속성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면 심장이 뛰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되며 공포증에 의해 삶의 제한 또는 속박성을 경험하며” 자극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공포를 느낄 때의 물리적인 신체 현상이 공포에 대해 결코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 정서란 생물학적, 생리학적, 사회적, 규약적 측면 모두가 얽혀 있기 때문에, 비록 정서가 의심할 여지없이 생물학적 기반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규범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다른 동물들이 느낄 수 있는 공포보다 더 거대한 영역을 가지며, 모든 대상을 두려워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상적 위험을 만든다. 공포는 항상 무엇무엇에 관한 공포이며, 대상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지향적이다. 공포가 화, 슬픔, 기쁨과 구별되는 것은 그 대상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에 대해 공포감을 갖지만, 그 대상의 실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면 공포감은 사라지고 익숙함에 물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익숙함과 편안함을 통해 그것은 일상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어둠에 대한 공포, 낯선 고립된 공간에서의 공포,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거대한 자연과 우주 앞에서의 공포, 이 외에도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여러 가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공포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 외에 우리가 일상에서 빈번하게 느끼는 공포의 양상은 다양하다. 더 이상 어떻게 감당을 할 수도 없고 융통해 갚을 수도 없는 카드빚, 대물림되는 폭력 가정 안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를 가족 구성원,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 누가 언제 어떻게 잘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회사원이 갖는 실직에의 공포, 돈이 다 떨어졌을 때 내일부턴 어떻게 먹고 사나를 고민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대한 공포, 데이트 폭력에 노출된 젊은 여성이 애인에게 느끼는 공포, 하다못해 공원 벤치 아래 풀숲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들쥐와 뱀과 같은 동물에 대한 공포. 이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공포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공포는 이처럼 대상을 갖는다.
병적 공포가 사회를 잠식할 때
병적 공포란 무엇인가? 일단 정신의학적으로 공포장애, 혹은 공포증, 또는 포비아(Phobia)라는 용어는 우리는 일반적이지 않은 병적인 공포 상황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공포증은 일반적으로 처음의 예상치 못한 위험한 상황이나 활동, 대상 등으로 야기된 공포감이 억제되어 있거나 잠재된 상태로 있다가 다른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일어나는 불안 장애의 한 유형이다. 2017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병적인 공포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음을 목도한다. 언제, 어디서 분노조절장애 환자에 의해 칼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공포, 언제 어디서 몰래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른다는 여성들의 공포, 가족관계에서 비롯되는 공포감 등등,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와 피로감이 현대인을 잠식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공포’라는 사실 자체로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현대의 정신의학에서 다루는 공포증처럼 ‘공포’의 문제를 병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물리적인 자연이 주는 공포에 속한다. 전깃불의 발달로 인한 낮의 연장과 밤의 활동성의 증가로 인해 현대에는 어둠의 공포는 많은 부분 극복되었다.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은 자연이 주는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그와 반비례해서 현대인들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공포에서 한걸음 뒷걸음친다. 나의 이웃, 학교, 직장, 심지어는 나의 가족들조차도 경계해야 할 대상인 유해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제까지의 인류의 역사 중 가장 안전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갖는 공포는 그 끝이 없이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병적인 공포와 정상적이고 개연성 있는 공포 사이의 간극이 줄어든다.
문제는 무분별한 정보의 공유를 통해 그 공포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 그 공포가 양산해내는 광적인 폭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어떤 특정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병적일 정도의 신상털기가 이루어지며 이를 온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다. 인터넷과 구글링을 통해 특정 인물의 거의 모든 것이 대중 앞에 까발려지고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폭격을 받는다. 어떤 사건을 통해 받은 공포감은 인터넷 공간에서 한 사람의 옷을 벗겨 돌을 던지는 마녀사냥을 통해 또 다른 자극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인인 나도 까딱 실수하면 마녀재판을 받겠구나 하는 공포감.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이 처할 수 있는 교사의 폭행과 학교 폭력의 위험 그리고 성폭력 앞에서 공포를 갖는다. 심지어 학교 교사마저도 아이들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할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문제는 예전 같으면 병적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는 이러한 공포감이 매우 개연성 있는 공포라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공간인 나의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전 남자친구는 갑자기 내 집에 찾아와 반려견을 죽이고 나를 폭행할 수 있다. 익숙하고 친숙한 공간인 내 집은 돌연 낯설고 두려운 공간으로 돌변하고 나는 한때 나와 가장 친밀한 사이였던 전 애인이나 전 남편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열정적 사랑이 불가능하고 힘들어지는 이유 역시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과 공포와 맞닿아 있다.
타자는 나의 지옥
집단에서 무기력한 개인은 자신이 당하는 피해에도 또 남이 당하는 피해에도 묵묵히 견뎌낼 수밖에 없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멀쩡함에도 다수의 아이가 피해 아이를 '비정상'으로 몰아가면 어쩔 수 없이 피해아이는 비정상이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충'으로 몰아가는 이러한 현상은 피해자를 두둔하거나 편을 드는 순간 반대편에 선 다수에 의해 나 역시 비정상적인 '충'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과거 특정인이나 사회적 주변인에 대한 낙인과 혐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나와 조금만 맞지 않아도 나와 다른 타인이나 집단에게 낙인을 찍고 온갖 '충'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폄하하고 비하한다. 서로에 대한 온갖 혐오의 언어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포털 사이트 댓글에 범람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진정한 정상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정상적이라는 범주나 규범이라는 것이 작동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거린다. 모두가 모두에게 적 혹은 벌레가 되는 시대 속에서 사르트르식으로 언명하자면 "타자는 나의 지옥"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서가 된다. 이 혐오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서는 다름 아닌 '공포'다. 무한경쟁이 가속화된 사회 속에서 내 몫을 빼앗길지도 모르고 조금만 실수해도 미끄러져 낙오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나보다 취약해 보이거나 혹은 내 것을 빼앗아갈지도 모르거나 잠재적으로 내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는 타자들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악은 두려움을 체험하는 것이며, 악행이란 타자를 상처입힘으로써 타자가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면서 자신은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공포, 혐오, 악 이 세 가지는 태생이 같은 세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갖추고 살기가 지독하게 힘들어지는 이 시대, 우리의 내면에서 낯선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공포와 그것이 극대화되어 악으로 전환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틀과 관점으로 타자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 난 죽음과 노화에 대한 공포를 바라볼 것이며,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성별화된 신체라는 인간의 조건과 숙명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윤리와 미학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물음 속에서 공포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 이 시대야말로 공포의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천착을 통해 현재, 우리의 행태에 대한 성찰과 돌아봄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범람하는 공포와 혐오의 한편에서 가능할 수 있는 인간의 성별화된 조건과 신체성, 그리고 타자의 문제를 새로운 프리즘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다. 공포와 혐오의 정서가 너무 만연해서, 옛날 사람들의 '좋은 소리'가 가치절하되고 해답도 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책이 여전히 공포 속에서 전율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나마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