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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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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좁은 문으로….” “문이 없는데….”

1.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시나요?” “무無!”
2.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뺨을 맞으면 손뼉 치며 웃어라.”
3.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손가락을 잘라 버려라.”
4.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수염이 없지?”
5.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올라가지도 않았는데요.”
6.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꽃 한 송이 들어 보이며….”
7.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허공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달린다.”
9. “나는 책임이 없소.” “너 때문에 성불하지 않았는데….”
10.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그렇게 취하고선….”
11.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안에 누가 계신가?”
12.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장 계시오?”
13. “주님께서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마디를 아는구나.”
14. “신을 벗어라.” “머리에 신어라.”
15.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이 밥통 같은 놈!”
16. “저 사람은 어째서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온몸으로 보아라.”
17.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요?”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버린 것이다.”
18.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삼麻 세 근!”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조선일보 2017년 11월 2일자 '한줄읽기'

최근작 :<예수처럼 부처처럼>
소개 :예수회 신부.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성과 영성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영석 (지은이)의 말
글이 참 좋다, 아껴가며 읽는다. 남은 페이지가 아까워 얼마나 천천히 읽었던가. 이런 책을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비유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붉은 산호초 앞에 넋을 잃는다. 흥미진진함에 흥분하다가 가슴 깊숙이 송곳처럼 푹 찔러오는 날카로움에 다시 깨어나 여기, 지금을 살게 한다.

이 책은 예수회 신부인 저자가 불교 철학을 공부한 후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만남’을 성경과 선승 무문혜개의 해설집인 『무문관』 안에서 그 접점을 찾아내어 풀어내 합일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는 데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무문관>은 중국 송대의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9) 선사가 1700여 칙(則)의 공안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48개의 공안을 가려 화두 참구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작가의 “『무문관』에 펼쳐진 침묵의 지혜가 성경 말씀에 한 줄기 신선한 빛을, 성경에 표현된 사랑의 말씀이 『무문관』의 48가지 공안(公案)에 생명의 물을 조금이나마 제공할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서로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종교체험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책 내용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꼭지 끝머리마다 자리한 작가의 짤막한 시는 묵상의 감칠맛을 내면서 다시 글 전체를 되새김질하고 음미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다음의 작가의 들어가는 글에서 이 책 전체의 구조와 내용을 살짝 맛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문법은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삶의 기술’(ars vitae)에 대해서는 겹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겹친다고 해서 동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고유의 주어와 술어로, 불교는 불교 특유의 목적어와 보어로 삶의 내용과 형식을 풀어나가니까요.
그렇다고 문법에 너무 끌려 다녀서는 핵심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우리말로 소통할 땐 자유자재이지만, 영어를 할라치면 그 놈의 문법 생각에 언제나 꽉 막혀버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요. 문법을 굴려야지 그것에 굴림을 당해서는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노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두 친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한 친구는 길이 좁고 문도 좁다(마태 7,13)고 말하고, 불교 신자인 다른 친구는 길이 너무 넓어서 문이 아예 없다(大道無門)고 말합니다.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 서서 서로 달리 표현합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는 진리를 인격적인 사랑과 자비의 측면에서, 불교 신자는 비인격적인 지혜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는 인격적 존재에게로 다가가는 길은 당연히 넓고 문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문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