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화에 얽힌 바이러스의 실체를 파헤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지구촌 곳곳을 덮치면서 전 세계 인구 18억 명 중 약 30%인 6억 명을 감염시키고, 1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히 20세기 흑사병이라 부를 만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물론 오늘날 불청객처럼 느닷없이 찾아와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는 에이즈, 사스, 조류독감, 구제역, 에볼라 출혈열 등의 원인은 모두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안식처인 숙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 무서운 파괴 본능을 드러내 인류에게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최근 잇따라 발표되는 연구 결과에서는 바이러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놓는 과학적 사실들이 전해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숙주를 해치는 무자비한 ‘괴물’이 아니라 공존·공생하며 생명체의 진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46억 년 지구 역사의 주인공은 바이러스?
그들은 인간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생명의 진화에 얽힌 바이러스의 실체를 파헤친다 !
‘불청객’ 바이러스는 마냥 두려운 존재인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지구촌 곳곳을 덮치면서 전 세계 인구 18억 명 중 약 30%인 6억 명을 감염시키고, 1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히 20세기 흑사병이라 부를 만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물론 오늘날 불청객처럼 느닷없이 찾아와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는 에이즈, 사스, 조류독감, 구제역, 에볼라 출혈열 등의 원인은 모두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안식처인 숙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 무서운 파괴 본능을 드러내 인류에게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최근 잇따라 발표되는 연구 결과에서는 바이러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놓는 과학적 사실들이 전해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숙주를 해치는 무자비한 ‘괴물’이 아니라 공존·공생하며 생명체의 진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숙주 생명체와의 공생이 그들의 생존 본능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엄마와 태아의 혈액형이 다를 경우 거부 반응 때문에 태아가 결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모체의 혈액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는 태아는 아무런 문제없이 쑥쑥 자란다. 바로 태반을 감싸고 있는 ‘합포체 영양막’ 덕분이다. 이 영양막은 산소와 영양분은 통과시키지만, 절묘하게도 모체에서 침입하는 림프구 같은 이물질을 차단시켜 태아를 보호한다. 이토록 신비로운 생명 현상의 비밀을 간직한 영양막의 기원을 밝히는 논문이 2000년 과학잡지 <네이처>에 게재되었다. 영양막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신사이틴(syncytin)이라는 단백질이 인간 게놈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 유전자의 산물이라는 내용이었다. 논문은 먼 옛날 바이러스가 인간의 조상에 감염되어 신사이틴을 제공했고, 지금도 인간의 몸속에 남아 태반을 형성하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태아를 모체 안에서 키우는 전략은 포유동물이 번영할 수 있었던 진화상의 중요한 변화였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태반을 형성하는 데 깊이 관여하는 단백질이 다름 아닌 바이러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생명체의 진화에 바이러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생물과 공생하거나 진화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례는 이 외에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생벌이다. 기생벌이 숙주 곤충의 유충에 알을 낳을 때, 체내에 있던 폴리드나 바이러스가 함께 주입된다. 이 바이러스는 숙주의 면역체계를 마비시켜 기생벌의 알이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돕는다. 폴리드나 바이러스가 기생벌을 돕는다면 숙주 곤충을 돕는 바이러스도 있다. 진딧물의 몸에는 기생벌의 알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 공생 세균이 있다. 이 세균이 방어 작용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다름 아닌 ‘APSE 파지 바이러스’이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온열지대에 서식하는 식물이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이유도 바이러스 때문이다. 식물 안에는 내열성을 돕는 내생식물이 자란다. 이 내생식물에 잠복한 바이러스가 열을 견디는 저항성을 부여한 덕분에 고온에서도 식물이 자랄 수 있다. 이처럼 질병을 일으켜 숙주를 죽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모색한 진화의 전략이다.
바이러스가 생명의 DNA에 남긴 흔적들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는 인간의 게놈에서 유전자가 차지하는 영역이 약 1.5%로 아주 적은 반면 바이러스나 바이러스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지는 전이인자 등은 증식을 거듭해 약 45%나 되는 영역을 차지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인간 게놈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때때로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종의 생물들 사이에서 교환되기도 한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원핵생물의 10%는 부모세대가 아닌 다른 종에게서 유전자를 얻었다. 특히 이런 유전자의 수평이동이 바이러스를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가 이미 바이러스와 일체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이러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생물종들은 고유한 특성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숱한 생물종 사이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파괴하고 공생하며 유전자를 교환하는 진화의 촉매 노릇을 해왔던 바이러스가 남긴 생명 진화의 흔적을 살펴볼 때, 진화를 이끌고 방향을 결정한 주인공이 바이러스였다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다.
바이러스 발견의 역사부터 기본 구조,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꼼꼼히 추적하며 새로운 특징들을 소개한 이 책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 이 책은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매년 대중 독자를 위한 과학책 중에서 뛰어난 저작을 선정해 시상하는 고단샤 과학출판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