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토속신앙에 대한 연구서이다. 성리학 유일(唯一)시대인 조선과 달리, 고려는 다종교-다문화 사회였다.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토속신앙이 유행하였다. 그 토대는 이미 태조 왕건 때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후삼국이 서로 대립·정립하던 때여서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교나 사회세력과도 손을 잡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런 경향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고려왕조에서는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이 보장,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여러 사상과 종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하였다.
최근작 :<고려 현종 연구> ,<고려 태조 왕건정권 연구> ,<고려의 토속신앙> … 총 26종 (모두보기) 소개 :대전광역시 출생. 대전고ㆍ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ㆍ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 부교수, 대전대학교 박물관장ㆍ인문예술대학 학장, 호서사학회ㆍ한국중세사학회 회장, 교육부 역사교육심의위원, 중학교 및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위원, 전국수학능력시험, 중등교사 임용시험 출제위원 역임
전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중요 저서
『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서경문화사, 1998), 『태조 왕건』(일빛, 2000... 대전광역시 출생. 대전고ㆍ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ㆍ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원광대학교 국사교육과 부교수, 대전대학교 박물관장ㆍ인문예술대학 학장, 호서사학회ㆍ한국중세사학회 회장, 교육부 역사교육심의위원, 중학교 및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위원, 전국수학능력시험, 중등교사 임용시험 출제위원 역임
전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중요 저서
『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서경문화사, 1998), 『태조 왕건』(일빛, 2000),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푸른 역사, 2003), 『고려 전기 정치사』(일지사, 2005), 『중국산책』(서경문화사, 2005), 『라이벌 한국사』(애플북스, 2007),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서경문화사, 2010), 『충청의 얼을 찾아서』(서경문화사, 2012), 『고려시대사 개론』(혜안, 2013), 『고려의 토속신앙』(혜안, 2017), 『고려태조 왕건정권 연구』(혜안, 2021)
우리의 토속신앙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끈질긴 생명력이다!
고려시대의 토속신앙을 통해 이 명제를 증명한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토속신앙에 대한 연구서이다. 성리학 유일(唯一)시대인 조선과 달리, 고려는 다종교-다문화 사회였다.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토속신앙이 유행하였다. 그 토대는 이미 태조 왕건 때에 마련되었다. 이것은 후삼국이 서로 대립‧정립하던 때여서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교나 사회세력과도 손을 잡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런 경향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고려왕조에서는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이 보장,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여러 사상과 종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하였다.
저자는 책에서 고려의 토속신앙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첫째는 산신 신앙이나 성황 신앙, 무격 신앙의 전반적인 내용과 의미, 그 변화 과정을 살피고 있다. 특히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였는가 하는 점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우선 산신 신앙을 보면, 신라의 5악 숭배가 고려 때도 꾸준히 이루어졌고, 천안의 성거산(聖居山)도 왕건이 산위에 오색 구름이 있는 것을 보고 산신이 있다 여겨 제사를 지내고 이 산을 ‘성거산’이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한 점, 현재 지리산이나 속리산의 ‘天王峰’, 계룡산의 ‘天皇峰’ 등의 명칭에서 보듯, 산이 하늘과 인간을 매개시켜주고 천왕(황)이 강림하는 곳이란 의미가 강해 인격신으로서의 산신 숭배개념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까지는 경주 ‘선도산 신모’나 ‘지리산 성모’처럼 여신(女神)으로서의 산신상이 삼국통일 이후, 남자 산신들로 바뀌어져 고려~조선을 거쳐 근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다음으로 성황 신앙을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 성황신과 관련된 성황당이 처음 보이는 것은 고려 성종대이다. 태조의 아들이었던 안종 욱(安宗 郁)이 헌정왕후와 사통한 죄로 귀양간 뒤, 자신이 죽으면 사수현(泗水縣)의 성황당(城隍堂) 남쪽에 묻어달라 하여 그렇게 한 결과 그의 아들 대량원군이 왕위에 올라 현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산신 신앙과 달리 성황 신앙은 중국에서 유입된 신앙형태였다. 다만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많아 성황사가 산에 설치되었던 관계로 산신 신앙과 혼합되었고, 조선중기 이후에는 성황 신앙과 산신 신앙이 혼동되어 민간의 기복신앙으로 합쳐지면서 그것이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특히 이 성황신앙은 국가권력과 일반백성들 사이에서 어떠한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았다.
셋째로는 무격 신앙의 내용 및 기원, 고려시대 각 시기별 무격 신앙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상고시대 때 무격(샤먼)은 정치적 지배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지만 점차 제사가 정치와 분리되면서 고유한 영역의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보통 엑스타시(Ecstasy)의 기술자로, 엑스타시를 통해 신과 인간을 융합시키는 기술을 습득하였다. 무격 신앙의 역사는 가장 오래되어, 삼국사기에 고구려 유리왕 때 왕이 병에 걸렸는데 무(巫)의 조언에 따라 억울하게 죽은 탁리와 사비에게 사과하자 병이 나았다는 기록, 신라 ‘차차웅’이란 명칭이 무격을 가리키는 단어였다는 점, 당 태종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 공격할 때에 무격의 말에 따라 요동성의 방어를 위해 미녀를 고주몽의 사당에 바쳤다는 점, 백제 의자왕대 땅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의 글을 보고 무격이 백제의 멸망을 점쳤던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를 통해 무격 신앙이 국가적으로도 성행하였음을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저자는 현재 민속학 연구에서는 도외시되고 있는, 토속신앙의 역사성을 고려를 중심으로 밝혔다. 이어 고려시대에 토속신앙이 지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와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는가, 특히 국가의 민에 대한 통치라는 측면에서 이들 신앙의 역사적 측면을 살피고 있다.
현재의 남원지역에 존재했던 지리산신사를 통한 산신 신앙의 상황을 살피고 고려시대 지리산 성모천왕의 실체와 그 역할에 대해서도 밝혔다. 다음으로 전남 나주에 있었던 금성산신사(錦城山神祠)를 중심으로, 나주 지방세력과 각종 신사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또한 경남 사천지역에 해당하는 사수현의 성황당과 고려 현종과의 관련을 추적, 현종이 어떻게 하여 사수현에 내려와 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사수현의 성황 신앙에 대해서도 탐구하였다. 한편, 전북 순창지역에서는 ‘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중요민속자료 제238호)이란 제목의 현판이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소개하고, 현판의 내용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순창 지방세력의 동향과 그에 관련된 성황 신앙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고려는 정부 차원에서 토속신앙에 대해 많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당을 건립하여 그들 신에게 제사를 하는가 하면 때로 는 작호(爵號)나 훈호(勳號)를 가하기도 하였다.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방의 신사도 있었다. 혜종사(惠宗祠)나 경남 사천의 성황당(城隍堂)이 그것이다. 또 이들 신사를 관리하고 제사하는 무격(巫覡)들을 우대하여 기우제를 지내거나 왕족들의 병을 치료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왕실의 정쟁에 무격들이 개입하여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방에도 토속신앙과 관련된 많은 신사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지방의 실력자인 향리들은 이들 신사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여 자신의 지역민들을 장악하려 하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조상을 산신이나 성황신으로 추봉하기도 하였고 이들 신사를 관리하는 무격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말‧조선초에 오면 이들 토속신앙을 음사(淫祀)라 배척하는 한편 지방의 신사에 대한 제사권을 다시 중앙에서 장악하려 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에게 제사권을 부여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고려의 토속신앙은 단순한 사상이나 신앙의 차원을 넘어 각 계층이나 세력간의 역학 관계 속에서 존재하였다 볼 수 있다. 즉 국가-지방세력-민이라는 역학 관계 속에서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사회든 인간의 정신이나 심리를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토속신앙은 유교세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토속신앙은 때로 외래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수용하기도 하고 융합하기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자주정신’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우리의 토속신앙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끈질긴 생명력이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고려시대의 토속신앙에 대해서는 별 주목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토속신앙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고대에서 조선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의미를 가진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