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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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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1960년 4월,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70년 4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그 10년 동안 나와 스코필드는 동행했고, 그 시절 나는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배웠다.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제34인”으로 불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교수로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그는 평생 선교와 장학사업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일본의 만행을 기록하여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지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지극했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결 같았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경기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시작됐다. 당시 우리 집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학비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내 초등학교 때 친구 아버지의 주선으로 나는 스코필드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나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지주로서 나의 가치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어성경반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것 못지않게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에는 고양이라도 웃길 정도로 익살스러우면서도 우리가 지각한 이유를 둘러댈라치면 “핑계 대지 마시오!”라고 또박 또박 우리말로 꾸짖으셨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그의 숙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할아버지는 사슴처럼 선한 얼굴로 나를 “운찬~”하고 부르곤 했는데, 손자뻘인 나에게 한 번도 존칭을 생략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예의와 품격을 갖추었던 분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꼭 엽서나 편지로 내게 안부를 전했을 만큼 자상한 분이기도 했다. 몇 달씩 외국에 나갔다 돌아오는 그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특히 내 가슴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그분의 철학적 신념이었다. 나는 보행이 불편한 그를 부축하며, 대학로를 산책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강조했다. 항상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특히 건설적 비판 정신을 기르라고 강조했다. 스코필드의 이런 가르침은 훗날 내가 1986년 “체육관 선거를 종식하고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교수 서명운동을 준비하도록 한 원동력이 됐고, 아직도 내 신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올곧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 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개탄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고, 그런 이유로 내가 대학을 진할 할 때도 경제학을 선택하도록 종용했다. 나는 그를 통해 사회 속에 몸담은 지식인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익히고 배웠다. 1970년 4월 12일 오후, 스코필드는 지금의 국립의료원 별관 32병동 5호실 병상에서 운명했다. 임종 며칠 전에도 나는 병상을 지켰는데,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던 모습이 아직까지 선하다. 그는 끝까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마지막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재산을 모두 보육원과 YMCA에 헌납하고 떠났다. 그리고 빈 몸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돌이켜보면 백발이 성성한 70대 할아버지와 철없는 열세 살 배기 꼬마의 만남이었거늘, 그는 나를 한결같이 성숙한 인격체로 대했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의 축복이자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는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 한다. 양지바른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자애로운 미소로 내게 말을 건네시는 듯하다. 더 부지런하게, 더 정직하게, 더 정의롭게 사랑하며 살라고……. : 내가 스코필드 박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명사 초청강연이 있었는데, 백발노인이 오셔서 1천여 명 학생들을 앞에 두고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3·1만세운동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가 1957년이었으니까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외할아버지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7년 감옥살이를 했고, 일제탄압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으며 자란 나는 스코필드 박사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어떻게 서양사람이 이토록 우리 민족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분을 만나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학입시로 차일피일 미루다 서울문리대에 입학하고 나서야 외국인 교수 숙소에 계셨던 스코필드 박사를 찾아갔다. 박사는 젊은 인재들을 올바르게 양성하는데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수의대 강좌 이외에 나머지 시간에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을 만나 영어성경을 가르치면서 정신적 지도를 많이 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스코필드 박사와의 인연은 영어공부에 그치지 않고 철학, 종교,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과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항상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직업소년학교, 야학 등을 찾아다니며 격려금을 나눠주던 박사의 모습은 우리를 크게 감화시켰다. 박사는 철학 문제와 이성적 사고에만 경도되어 있던 나에게 사회봉사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주셨다. 수년 뒤 나는 박사 댁에서 함께 영어성경을 공부하면서 만난 이화여대생과 결혼까지 하게 됐다. 스코필드 박사는 정이 많고 자애로운 분이지만 불의와 부정을 보면 여지없이 꾸짖고 비판하는 엄격한 분이셨다. 4·19와 5·16을 겪으며 정치, 사상문제로 고민이 많던 대학 시절에 스코필드 박사는 어느 교수님보다 가까운 나의 상담자셨다. 지금껏 가슴에 가장 아련히 남는 것은 그분의 검소한 삶과 철저히 남을 돕는 모습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위해, 밥 늦게까지 캐나다와 미국의 친구들에게 자세히 편지를 썼다. 그러면 50달러, 100달러의 돈이 오는데, 이걸 모아 고아원과 소년원을 돕고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셨다. 그러나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해선 옷 한 벌 사지 않았다. 종이 한 장도 아끼고, 전깃불도 책상 등만 켜서 절약했다. 편지를 길게 여러 장 쓰면 봉투에 넣어 조그만 저울에 달았는데, 5g, 10g이 초과하면 항공우편료가 비싸진다며 편지의 여백을 가위로 잘라서 무게를 줄일 정도였다. 스코필드 박사의 그 모습이 일생 나의 가슴 속에 살아서 내가 오만해지거나 방만해질 때마다 나를 꾸짖으시니, 당신은 돌아가셨어도 부족한 제자에게 큰 사랑을 베푸시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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