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책. 저자는 홍사익이 제14방면군 병참총감을 맡고 있을 당시 필리핀에서 함께 복무한 인연으로 그의 이름을 일찍부터 들었지만, 전범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그 일을 듣고 일종의 충격을 받아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그때부터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을 샅샅이 뒤지며, 일본인 관계자는 물론 현해탄을 수차례 건너 한국인 친지들을 인터뷰했다.
취재 중에, 홍사익을 저세상으로 보낸 교수대의 자재(資材)가 자신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사역(使役)을 나갔던 목공소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원고는 1980년대 초반 문예춘추에서 펴내는 잡지 〈쇼군!(諸君!)〉에 연재됐고, 이를 보완해 1986년 문예춘추에서 〈洪思翊中將の處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범재판”을 둘러싼 거대담론(巨大談論)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홍사익의 재판기록을 파고 또 팔 뿐이어서, 그것이 오히려 독자에게는 지루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어 번역원고로 원고지 2천 매가 넘는 이 재판기록에 대한 검토의 최종 결론은, 홍사익은 무죄라는 것이고, 그 점에 관해서는 어떤 독자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최근작 :<지혜의 발견> ,<공기의 연구> ,<홍사익 중장의 처형> … 총 75종 (모두보기) 소개 :1921년 도쿄 도 출생. 1942년 아오야마학원고등상업학부 졸업. 2차 세계대전 당시 야포부대 소위로 마닐라 전투에 참가했다가 필리핀의 포로가 되었고, 1947년 풀려나 귀국한다. 그 후 야마모토 서점을 설립하여 성서학과 관련된 서적 출판에 종사한다. 1970년, 이자야 벤다산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일본인과 유대인』이 3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또한 ‘일본인론’을 출간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문화와 사회를 분석하는 독자적인 논고는 ‘야마모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평론가이자 야마모토 서점 점주로, 1991년 타계했다.
저서에는 『내 안의 일본군(私の中の日本軍)』, 『공기의 연구(‘空氣’の硏究)』(이상 文藝春秋), 『일본은 어째서 패배했는가(日本はなぜ敗れるのか)』(角川書店), 『제왕학(帝王學)』(日本經濟新聞社), 『일본인이란 무엇인가(日本人とは何か)』, 『쇼와천황 연구(昭和天皇の硏究)』(이상 祥傳社), 『어째서 일본인은 바뀌지 않는가(なぜ日本人は變われないのか)』, 『일본인은 무엇이 부족한가(日本人には何が欠けているのか)』, 『일본교는 일본을 구원할 것인가(日本敎は日本を救えるか)』(이상 さくら舍) 등이 있다.
최근작 : 소개 :1964년, 서울 출생. 1982년, 서울대 인문대 입학. 자유기고가.
패전 직전의 남양 전선으로 부임해 전범(戰犯)으로 처형된 홍사익
교수대에 오를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 중장이었던 홍사익(洪思翊).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 광복군(光復軍)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패전 직전의 남양 전선으로 부임해 전범(戰犯)으로 처형되었다.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이 책에서 누누이 확인하고 또 강조하고 있듯이, 홍사익은 ‘자의(自意)로’ ‘흔쾌히’ 필리핀으로 갔던 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이 죽을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을 회피할 수단과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갔을까? 그는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그는 B급 전범으로서 얼마든지 처형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전범재판과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던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조차, 홍사익의 직속상관이었던 남방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대장조차 전범 재판에서 장황한 자기 변명을 일삼았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인으로서 최고위직인 일본군 중장으로 복무했고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일본군 지휘관으로 독립군 소탕전에도 나섰다. 여기까지가 소위 말하는 객관적 역사의 기록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는 변명의 여지없는 친일파다. 그런데 일본군에 복무하면서도 독립군과의 연락과 끊임없이 이어가고 봉급을 쪼개 지원을 지속했다. 우리가 배워왔던 친일파와는 뭔가 다르다. 그 느낌은 공식적 기록 너머에 있는, 인간 홍사익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한 인간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 중장이었던 홍사익(洪思翊). 그는 광복군(光復軍)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패전 직전의 남양 전선으로 부임해 전범(戰犯)으로 처형되었다.
도대체 태평양전쟁은 어떤 결말을 가져오게 될 것인가? 홍 소장이 남방으로 간다면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병참총감, 총포로수용소장으로서 그의 남방행은 군 당국이 이미 홍 소장의 신변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그것을 위험시해서 멀리 쫓아 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대로 부임해서 과연 안전할까? (장남) 국선 씨의 걱정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이상 그대로 일본 육군을 신뢰하고 운명을 맡겨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탈영병 문제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는 그 걱정을 솔직하게 홍 소장에게 털어 놓았다. 그때 홍 소장은 처음으로 “지대형(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의 본명) 씨한테서 몇 번씩이나 광복군에 참가해달라는 연락이 있었다”고 말했다.
- 『홍사익 중장의 처형』, p.51
이 점과 관련해서 홍사익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 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 도쿄특파원 김을한(金乙漢)에 의해 전해졌다. 홍사익은 김을한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있던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으로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하는 게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고,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이번에 가는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조선 사람이 수백만이나 전쟁에 동원되었는데 최고 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배신을 한다면 병사(兵士)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니, 다만 나 혼자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내용은 김을한의 저서 <여기 참 사람이 있다>(1960, 신태양사)에 실려 있다.
- 『홍사익 중장의 처형』 p.56 각주
이 책의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대한제국의 유학생 출신으로 일본육사에 입학한 쪽과 한일합병 이후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쪽은 뭔가 다른 것 같다고 전제하면서, 전자(前者)의 속마음에는 아무래도 독립이 들어 있었던 게 아니었는지 자문(自問)한다. 실제로 그들은 망국(亡國)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 앞에서 모종의 맹세를 했고, 그 맹세에 따라 적지 않은 숫자의 한국계 일본군 장교들이 망명을 결행해 독립군에 합류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저자가 홍사익의 장남으로부터 입수한, 대한제국 유학생 출신 일본육사 졸업생들이 꾸린 친목회의 회보(會報) <전의(全誼)>에 실린 기사들을 보면 - 저자 자신이 적확하게 짚고 있듯이 - 대체 이런 글들이 어떻게 일본군 안에서 유통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만큼 과격하고, 독립에 대한 희구(希求)가 배어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군 장교의 신분임에도 자신의 권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독립군 밀사에게 끌러 주는 장면에 이르면, 그동안의 상식과 선입견이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다.
홍사익은 일본군에 들어갔던 것도 조국의 명령이었고, 일본군에 남았던 것도 훗날 독립할 조국의 명령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본군복이란 일시적으로는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할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단지,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무인(武人)으로서 명령에 충성한다. 이것이 한국의 근현대사 전공자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료(史料)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저자가 내린 해석이다. 달리 말하면 - 도산(島山)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겠지만 ? 적어도 위관(尉官) 때까지 그들의 정신은 “민족자강론(民族自彊論)”과 대차(大差)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판단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그의 일생, 그리고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재판기록. 홍사익이 죽은 이유가 밝혀진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일본의 작가이자 평론가인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쓴 책이다. 저자는 홍사익이 제14방면군 병참총감을 맡고 있을 당시 필리핀에서 함께 복무한 인연으로 그의 이름을 일찍부터 들었지만, 전범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그 일을 듣고 일종의 충격을 받아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그때부터 12년 동안 홍사익의 재판기록을 샅샅이 뒤지며, 일본인 관계자는 물론 현해탄을 수차례 건너 한국인 친지들을 인터뷰했다.
취재 중에, 홍사익을 저세상으로 보낸 교수대의 자재(資材)가 자신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사역(使役)을 나갔던 목공소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원고는 1980년대 초반 문예춘추에서 펴내는 잡지 〈쇼군!(諸君!)〉에 연재됐고, 이를 보완해 1986년 문예춘추에서 〈洪思翊中將の處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범재판”을 둘러싼 거대담론(巨大談論)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홍사익의 재판기록을 파고 또 팔 뿐이어서, 그것이 오히려 독자에게는 지루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어 번역원고로 원고지 2천 매가 넘는 이 재판기록에 대한 검토의 최종 결론은, 홍사익은 무죄라는 것이고, 그 점에 관해서는 어떤 독자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전범(戰犯)으로 몰려 교수대에 오를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길고 긴 재판극의 참다운 주인공은 재판관도 검사도 변호인도 아니고, 또 증인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종일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홍 중장이었다. 따라서 그 드라마는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에 대한 처형을 과연 정당화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드라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과묵한 홍 중장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판결 후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고 하는 다음 한 마디가 그 일단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수합격(絞首合格)이다!” 교수형 합격,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말은 징병검사에 있어서의 갑종(甲種) 합격에 비유한 농담이다. 그런 말로 가깝게 다가온 자신의 처형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는 일본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적인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 『홍사익 중장의 처형』, p.642
만일 그것이 그의 죄였다면, 그것은 바로 “모르고 저지른 죄”였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지금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죄는 아니라 해도 그 자체는 ‘죄’일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죄 그 자체’의 용서를 비는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神) 외에는 없다. 그것은 마치 ‘속죄양’과 같은 위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변호인이 말한 “시간이라는 법정”은 그를 순교자라고 규정은 해도 ‘죄인’이라고는 규정할 수 없고, 심판받은 것은 전범 법정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홍 중장이 ‘죄’를 느낀 대상은 포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시도 잊지 못했던 고국도, 동포도, 매년 새해가 되면 반드시 찾았던 이왕가도, 또 그가 젊었을 적에 자신의 봉급을 쪼개 도와주었던 독립운동가와 동기생의 가족들도, 또 그 아오야마 묘지의 맹세도, 모두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홍 중장이 언제나 선의를 갖고 대했던 사람들이었고, 만일 그가 그 사람들에게 대해 “모르고 저지른 죄”가 있다면 그 용서를 신에게 구했을 사람들이다.
시간이 왔다. “하나님 계신 곳에서 만납시다.” 가타야마 목사에게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홍 중장은 조용히 교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보통 사람이 걷는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세로 그는 갔고,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 『홍사익 중장의 처형』, p.681
훼예포폄(毁譽褒貶)의 시대에 가슴을 울리는 인간
저자가 이 책에서 누누이 확인하고 또 강조하고 있듯이, 홍사익은 ‘자의(自意)로’ ‘흔쾌히’ 필리핀으로 갔던 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이 죽을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곳을 회피할 수단과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갔을까? 그는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최후의 순간에 염치와 희생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친일파 가운데 그런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죽음이 주는 그 느낌. 오늘날과 같이 협량(狹量)한 이념대결로 핏대를 세우는 세태(世態)에, 그 느낌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의 지평(地平)을 한 차원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이 책을 한국인 독자에게 소개하게 된 가장 큰 동기(動機)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종장(終章)을 포함해 모두 26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남방부임’부터 제4장 ‘출생전설’까지는 홍사익이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들어가 일본군에 남게 되기까지 과정과 이를 둘러싼 대한제국 쇠망(衰亡)의 역사, 그리고 그의 고민을 추적한다. 지금은 도저히 접할 수 없는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어서, 이른바 ‘한국계 일본군 장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5장 ‘허구의 응수’부터 제9장 ‘평상심’까지, 저자는 홍사익이 일본군 몰락의 와중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그 모습이 패전을 눈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던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쓰고 있다. 홍사익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10장 ‘야마시타 대장 재판의 증인’부터 제24장 ‘판결’까지는 전범재판에 대한 분석이다. 1천 페이지가 넘는 기록을 샅샅이 훑고, 이를 사실과 일일이 대조한 다음, 저자는 홍사익이 무죄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제25장 ‘성서’와 종장(終章) ‘교수대’는 처형 직전 홍사익의 내면(內面)을 그린다.
이번에 페이퍼로드가 출간한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2016년 치쿠마서방이 고본으로 다시 펴낸 ??洪思翊中將の處刑 上·下??를 저본으로, 200개가 넘는 각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