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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예술

이름: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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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살로메>

목수에서 마스터빌더까지

이 책의 제목이 <목수에서 마스터빌더까지>입니다. 손으로 나무를 다루는 사람을 우리는 목수라고 하면 서양은 마스터빌더(혹은 프레이머)라고 합니다. 우리말에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직업사전에는 1만 가지가 넘는 직업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직업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아 놀라게 되는 그 많은 직업이 모두 평등하거나 모두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말은 역시 사전에나 나오는 말입니다. 이 1만 가지나 넘는 직업에 목수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나무목(木)자와 손수(手)자를 쓴 목수라는 직업은 그러니까 ‘나무를 손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정보화되어 힘들고 어려운 일은 산업로봇이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사람 손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목수의 일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건축 특히 주택시장은 그 파이(pie)가 너무 작습니다. 사람들이 다 아파트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아파트에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 때를 앞서 준비하려는 목수의 꿈을 꾸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필자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인생에서 한 10년쯤 방황해도 그 이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행복한 일을 찾아 그 일을 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 일을 찾는데 <목수에서 마스터빌더까지>가 하나의 대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수는 가장 영리한 사람이며 가장 인내심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강한 사람이다!

살로메

저는 2020년 12월23일부터 이듬해 2월3일까지 이스라엘에 머물렀습니다. 60까지는 생계형작가로 살았기에 이제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40일 동안 이스라엘 곳곳을 걸으며 사색했고, 걸으며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도서관에서 쓴 소설이 <살로메>입니다. 소설은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15~29절에 기록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자 요한이 광야에게 왕을 질타했고, 이 일로 옥에 갇혔습니다. 왕의 생일 날, 살로메가 춤을 춰 왕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반’ 대신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았습니다. 연회에서 춤을 춘 소녀는 공주인가 무희인가. 이것은 신약성서 최대의 미스터리입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와 살로메, 헤롯과 무희, 무희와 세례 요한!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습니다. 소설이 2,000년 전 연회가 열렸던 마케루스의 비밀의 문을 열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살면서 길을 잃었거든 산티아고에 가라

나는 먼 길을 돌아 작가가 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그것은 차라리 운명이었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오고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만다. 나는 집짓는 일을 했다. 일은 좋았지만 진정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이제 그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겠다는 독립선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글쓰기였고 그 소재는 집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몸서리치도록 행복한 일이다. 그렇게 쓴 책이 한 권, 두 권? 열여섯 권이 세상에 나왔다. 작가로 산 지 6년, 문제가 생겼다. 심신이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뭐가 문제일까? 나는 지쳤다. 글을 쓰려면 뭔가 막막함이 밀려왔다. 몸도 의자에 앉아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7년. 소위 안식년을 맞았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맞는 안식년에 나는 뭔가 특별한 여행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산티아고였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필자가 산티아고에 간 것에는 작가적 호기심도 한몫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약성서에 나오는 ‘야고보 죽음의 미스터리를 찾아서’였다. 성서를 보며 필자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이 바로 야고보의 죽음이다. 야고보는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예수의 3대 제자였다. 그런 그가 세상의 끝인 스페인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7년 만에 돌아온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때의 일을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무렵 헤로데 왕이 손을 뻗쳐 교회의 몇몇 사람들을 학대했다. 그리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없애 버렸다. (사도 12,1)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예수와 같은 정식적인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사형수에게는 변론의 기회가 세 번 주어짐에도 불과하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사실보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때의 일을 성서에는 위와 같이 딱 한 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중에 첫 순교자였는데 말이다. 나의 산티아고 순례는 이 책의 부제처럼 ‘야고보 죽음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7년 동안 야고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했고, 어찌하여 그 먼 길을 죽어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작가적 호기심으로 이 길을 걸었다. 산티아고에 가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또 하나 궁금증이 생겼다. ‘왜 유독 한국인들이 산티아고에 많이 갈까?‘ 하여 산티아고에 다녀온 분들을 만나면 내 첫 질문이 “왜 산티아고였습니까?” 였다. 2004년 한국인 산티아고 순례객이 18명으로 시작해 2016년에 4,536명이나 되었다. 이 숫자는 산티아고를 찾는 전세계 순례객의 나라에서 아홉 번째를 차지한다. 하여 이웃집 마실 가듯 산티아고를 찾는 유럽 순례객들은 한국인을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너희는 왜 이 먼 곳까지 순례를 오니?‘ 였다. 왜 대한민국은 산티아고에 열광할까? 필자가 산티아고를 걸으며 만난 한국 순례자에게 물었다. 왜 산티아고였냐고. 필자의 결론은 ’한국과 한국인은 이제 성찰(省察)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삶의 속도를 늦춰야 하는 데 그러기 위해 산티아고만한 곳이 없으니까. 필자가 이 많은 숙제를 하러 산티아고에 간 것은 아니다. 그냥 40여 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걸었을 뿐이다. 2016년 10월 필자는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주변에서 산티아고 어땠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길을 걷다보면 마법 같은 순간이 온다. 당신이 살면서 길을 잃었던 잃지 않았든 그날이 그날 같아 사는 게 가슴 떨리지 않는다면 산티아고에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6년 겨울 김집

예수 옷자락을 잡다

나 어릴 적, 조선에서 태어난 한(恨) 많은 어머니는 예배당에 엎드려 흘린 눈물이 자신의 옷자락을 적시고 마룻바닥을 적셨다. 지금 당신의 눈물은, 자는 듯 주님의 품안에 데려가 달라는 기도보다 아들의 불신앙(不信仰)에 대한 것일 게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소원(기도)을 들어드리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내 실존(實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필자도 어릴 적 예배당에 다녔다. 성경공부를 하며 숱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 끝은 언제나 나의 믿음의 부족으로 귀결되었다. 무조건 믿어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표징(表徵)이니까. 나는 교회 밖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무교회주의에 기웃거렸고 성공회 수도원이던 <예수원>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가 찾는 답은 없었다. 아니 나는 답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떠날 구실을 찾았다는 것이 옳다. 찾는 것이 없으니 구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내 의지대로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흘러 필자가 장년이 된 어느 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있었다. “예.수.였.다.” 인류 역사상 그이보다 더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회자(回刺)되는 인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곧 신약성서다. 신약성서는 젊은 시절 내 방황의 근원이다. 예수의 이적(異跡). 나는 이 부분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성서에는 ‘병이 나았다’는 이적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혹 그 말이, 육신의 병보다 그 병으로 인해 가족과 마을로부터 격리되어 처절한 외로움 속에 살아가던 그들이 예수를 만나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병이 나았다’는 말이 혹 구원(救援, salvation) 받았다는 말은 아닐까? 이 구원이란 깨달음 즉 앎 아니었을까? 앎이란 무엇일까? 진리일까? 그것은 혹 자신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는 자각(自覺) 아니었을까? <예수 옷자락을 잡다>는 소설이다. ‘신약 역사소설’이거나 ‘신약 실명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이 책은 작가의 상상을 바탕으로 예수의 이적을 필자 나름의 해석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였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검열이었다. 소위 표현의 수위(水位)를 조절하는 것이다. 때론 당연했고 때론 화가 났고 때론 타협했다. <예수 옷자락을 잡다>는 이렇게 쓰였다. 이 책을 아직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는 구순(九旬)의 어머니께 바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주(主)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도다.”

이것이 목조주택이다 : 마감편

2013년 2월 <이것이 목조주택이다-골조편>이 발간된데 이어 이번에 나온 책은 <이것이 목조주택이다_마감편>이다. 목조주택의 마감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책 한 권 분량의 책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필자도 했다. 처음 <이것이 목조주택이다!!> 책을 내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목조주택 현장에 가서 생생한 사진을 찍어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자료들을 한 권에 책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칫 건축에 문외한인 예비건축주가 목조주택을 짓는데 진정 알고 싶은 것을 빠뜨리거나 주마간산(走馬看山:말을 타고 가면서 산을 보는 것)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목조주택에 사용하는 자재나 재료들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목조주택 초창기 외장재는 비닐사이딩 뿐이었으나 지금은 시멘트사이딩이나 조적마감 혹은 스타코플렉스까지 다양해졌고 지붕 역시 아스팔트슁글 일색에서 스패니쉬 기와나 징크(모던주택)를 올리면서 주택의 표정이 훨씬 밝고 화사해졌다. 집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벽지 일색이던 마감재에서 벗어나 벽 허리 아래를 루버로 마감한다든지, 거실 천장을 중목구조로 나무가 그대로 노출되도록 해 나무의 따뜻함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한 것이 좋은 예이다. 목조주택은 집의 골격이 목구조일 뿐 그 안팎의 마무리는 전혀 나무를 사용하지 않기에 목조주택을 잘 모르는 일반인은 “목조주택인데 왜 나무는 하나도 안보여요?”라는 질문을 한다. 이렇게 보면 목조주택이 좀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있다. 건축의 3대 요소인 구조, 기능, 미에서 목조주택의 구조와 기능은 충분히 검증되었으므로 이제 미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 사실 그동안 목조주택의 아름다움이란 겉으로 보여 지는 외관 즉 지붕 같은 부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여 지는 것일 뿐 그 안에 사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한 내적인 아름다움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예비건축주들의 집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기대한다. “집의 아름다움은 앓음(앓다)에서 나오기에...” - 머리말

청소년을 위한 한옥감상법

이 책의 제목은 <청소년을 위한 한옥감상법>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된 독자가 청소년만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기성세대들도 모르는 우리 한옥(고건축)을 어른들을 대신해서 집아저씨인(제가 김집이니까...^^) 필자가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집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이 책을 읽으시고, 이 책을 바탕으로 아이들과 수덕사 대웅전이랑 북촌 한옥마을이랑 양동 서백당에 가셔서 아이들에게 우리 한옥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실 수 있는, 이 책이 그 동기부여가 된다면 필자가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한옥에 대한 그 과학적인 비밀과 자연과 끊임없이 소통하면 살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이 우리의 한옥에 담겨있음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랑 수덕사 대웅전 배흘림기둥을 쓰다듬으며 700백 년 전 고려시대의 숨결을 나무를 통해 아이에게 느껴보도록 하십시오. 지금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겠지만 아이의 꿈은 그 순간 자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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