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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고미숙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0년, 대한민국 강원도 정선 함백

직업:고전평론가

기타: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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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현자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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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큰글자책] 고미숙의 인생 특강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미션은 ‘거리의 재구성’이다. 이름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넘어 ‘욕망과의 거리두기’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의 대원칙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수행되려면 ‘욕망과의 거리두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게 더 근본적인 처방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열광과 고립을 오가는 방식으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만약 코로나한테도 지성이 있다면,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제 그만 질주를 멈추라는 것. 욕망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것. 어떻게? 소비와 쾌락에서 휴식과 성찰로. 외적 확장에서 내적 충만으로. 자연의 도구화에서 자연과의 공존으로. 사실 이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인문학의 장에선 늘 환기되던 이슈였다. 코로나가 그것을 명료하게, 적나라하게 가시화했을 뿐이다. 코로나19뿐 아니라 이후에 도래할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처할 수 있는 면역력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큰글자책] 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생명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존재는 부모의 돌봄을 받다가 자기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떠나요. 이건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아무리 단란해도 결혼을 하려면 집을 떠나야죠. 아니, 그 이전에 머나먼 타국까지 유학도 가잖아요?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집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학교를 가는 순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낯선 존재들과 지내는 거죠. 학교를 마치면, 직장으로, 그다음엔 결혼으로. 특별한 경우엔 출가를 하기도 하고요. 이것이 인생의 행로죠. 그러니까 이게 대전제라면, 아예 처음부터 가족에 대한 표상을 바꾸자는 거예요. 집에 문제가 있어서 길에 나서는 게 아니라, 길을 나서는 게 인생이니까 집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리자는 거죠. 그렇게만 되어도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또 소위 정상적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경우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겠죠. 그저 다를 뿐이지 모자란 게 아니니까요.

[큰글자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인류가 고안해 낸 운명론 가운데 음양오행론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장점이다. (……) 가장 원대하고도 고매한 비전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큰글자책]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시점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깎이로 ‘생계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이때 둘의 궤적은 사뭇 중첩된다. 문체반정과 수원 화성 축조, 천주교 사태 등 정조의 치세를 장식하는 주요 사건들에 둘은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 대해 ‘노 코멘트’ 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은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아주 없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어 20여 가지의 환술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 이치를 안다면 지사(地師; 지관)의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정약용, 「풍수 신앙의 허구성」, 『다산논설선집』, 75쪽) 참 까칠하다. 연암을 마치 동시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에도 더러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데다, 인용한 부분도 하나같이 수레와 벽돌 등 기술지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큰글자책]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이 책의 서막은 2020년 코로나가 막 도래했던 그즈음이었다. 코비드19라는 낯선 미생물의 습격하에 전지구가 요동치던 그 시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지?’라는 질문과 함께 그동안 막연하게 품어 왔던 두 개의 고전에 대한 서사를 강의로 펼치게 되었다. 『동의보감』 vs 『숫타니파타』. 두 개의 고전을 교차하면서 삶과 문명의 지도를 다시 그려 보고 싶었다. 전자가 몸에서 자연으로 이어지는 경로라면, 후자는 마음에서 우주로 연결되는 행로다. 전자가 동아시아 문명의 역사와 전통이 무르익은 노년의 로고스라면, 후자는 브라만교라는 오래된 전통을 깨고 인류 지성사에 막 등장한 풋풋한 청년의 파토스다. 노년의 로고스와 청년의 파토스가 교차하는 지적 모험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물론 몸에서 자연으로 가는 여행, 마음에서 우주로 가는 여행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정화 스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온전히 물질이고, 온전히 영혼”이기 때문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큰글자책] 청년 붓다

“나는 고전평론가다. 고전은 내게 있어 일용할 양식이자 활동의 플랫폼이고 존재의 지평선이다. 그동안 『열하일기』, 『동의보감』, 『임꺽정』 등을 ‘리라이팅’해 왔는데, 동양고전은 기본적으로 유불도儒佛道가 교차한다. 따라서 고전평론을 하다 보면 불경을 만나는 거야 필연적인 코스다. 크게 보면, 『동의보감』이 몸과 자연의 원리에 대한 탐구라면, 불교는 마음을 통해 우주의 다르마를 터득해 가는 여정이다(2021년 말에 낸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 with 동의보감 & 숫타니파타』가 그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다). 그러니 고전을 통해 ‘몸과 마음’, ‘생명과 우주’에 대한 탐구의 길 위에 들어선 다음에야 붓다와 마주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중에서도 나는 붓다의 생애가 가장 흥미진진했다.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매 장면이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인생 스토리라니, 이렇게 전복적인 사유의 여정이라니. 비전은 심오하고 일상은 세밀하였다. 심오한데 이렇게 디테일하다고? 놀라웠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는 청년이었다! 출가할 때가 스물아홉 살, 성도할 때가 서른다섯 살. 청년기에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온몸으로 깨쳐 ‘일체지’一切智의 경지에 이르렀다. 완벽한 자유, 완벽한 해방이었다! 청년이 어떻게 그럴 수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청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년의 활기, 청년의 열정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성취였다.”

계몽의 시대

“인간중심주의, 민족, 그리고 계몽적 지식과 교육 등등. 이 항목들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자본의 고도화와 더불어 조금씩 얼굴과 몸매를 바꿔 가면서. 이 지배를 수락하는 한 새로운 가치의 생성은 불가능하다. 계보학적 탐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원의 장’으로 돌아가 그 기호들이 탄생하는 현장을 포착하는 것, 하여 그 기호들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돌출한 것임을 목격하는 것, 그것이 이 계보학이 겨냥하는 지점이다. <설국열차>의 옆문을 열고 나오면 설원이 펼쳐진다. 생존자인 ‘꼬마’는 북극곰과 마주친다. 눈앞에 생명과 야생의 대지가 펼쳐진 것. 그렇다! 근대성 안에서는 근대를 벗어날 길이 없다. 옆문을 박차고 나올 때, 즉 그 중심에서 ‘외부’를 사유할 때 그때 비로소 출구가 열릴 것이다. 이 책 또한 ‘출구찾기’의 일환이 되기를 희망한다.” (「책머리에」 중에서)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세트 - 전3권

우리 삶의 비전을 탐구하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지적 기반 혹은 앎의 배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저 20세기 초, 근대적 지식의 토대가 구축되는 기원의 장, 한국 근대의 계몽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앎의 매트릭스, 그 심연의 주름들을 훤히 꿰뚫을 수 있어야만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생길 것이므로.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선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바로 ‘고전’이다. 『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 조르바』, 『걸리버 여행기』 등등. 인생과 우주의 지혜를 담은 책들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고전 자체가 ‘길’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여행을 다룬 책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그런 책들. 이름하여 ‘로드클래식’(여행기 고전)! 위의 작품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들은 각 문명권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그야말로 ‘별 중의 별’이다.” “만약 이 ‘로드클래식’의 주인공들과 여행을 한다면? 아마 오대양 육대주를 다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돈키호테, 삼장법사와 그 제자들, 허클베리 핀과 조르바, 그리고 걸리버, 이들은 대체 길 위에서 어떤 삶, 어떤 운명과 마주친 것일까? 그 지도를 탐사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콘셉트이다. 사족 하나.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려면? 먼저 묵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버블경제와 성공신화, 스위트 홈의 망상 등은 말끔히 잊으시라. 비우는 만큼 길이 열릴 것이니. 이 ‘로드클래식’과 더불어 그 길을 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이어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삶’을!”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이 책의 키워드는 ‘몸과 우주’다. 몸과 우주, 우리는 이 단어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몸은 병원에 맡기고, 우주는 ‘천문학적 쇼’의 배경으로나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숱한 질병과 번뇌들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인문학의 화두는 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몸이야말로 삶의 구체적 현장이자 유일한 리얼리티다. 가장 깊으면서 동시에 가장 투명하고, 가장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야생적이다. 소외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 그 안에 있다. 헌데, 그 길을 탐사하다 보면 광활한 우주가 펼쳐진다. 정치와 양생이 마주치고, 여성성과 지혜가 결합하며, 교육의 원리와 음양의 이치가 교차하는! 이를테면,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고나 할까.” (머리말 중에서)

고미숙의 인생 특강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미션은 ‘거리의 재구성’이다. 이름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넘어 ‘욕망과의 거리두기’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의 대원칙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수행되려면 ‘욕망과의 거리두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게 더 근본적인 처방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열광과 고립을 오가는 방식으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만약 코로나한테도 지성이 있다면,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제 그만 질주를 멈추라는 것. 욕망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것. 어떻게? 소비와 쾌락에서 휴식과 성찰로. 외적 확장에서 내적 충만으로. 자연의 도구화에서 자연과의 공존으로. 사실 이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인문학의 장에선 늘 환기되던 이슈였다. 코로나가 그것을 명료하게, 적나라하게 가시화했을 뿐이다. 코로나19뿐 아니라 이후에 도래할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처할 수 있는 면역력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곰숙씨가 사랑한 고전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고전을 읽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가 문득 병이 들고 괴로움이 닥쳐오면 자기도 모르게 고전을 집어들게 된다. 혹은 고전의 지혜를 찾아다니게 된다. 이 말은 고전 안에 자연의 리듬이 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지혜란 결국 리듬의 조율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했다. 처음에는 고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지식인으로 출발했지만, 고전평론가가 된 이래 고전을 읽고 쓰는 것이 삶의 근간이자 현장이 되었다. 그것은 고전 안에 담긴 시공의 리듬을 익히고 터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알게 되었다. 일 년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면, 인생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사실을. 때에 맞게, 때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전의 지혜라는 것을. 고전과 인생, 그리고 사계의 삼중주!”

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생명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존재는 부모의 돌봄을 받다가 자기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떠나요. 이건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아무리 단란해도 결혼을 하려면 집을 떠나야죠. 아니, 그 이전에 머나먼 타국까지 유학도 가잖아요?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집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학교를 가는 순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낯선 존재들과 지내는 거죠. 학교를 마치면, 직장으로, 그다음엔 결혼으로. 특별한 경우엔 출가를 하기도 하고요. 이것이 인생의 행로죠. 그러니까 이게 대전제라면, 아예 처음부터 가족에 대한 표상을 바꾸자는 거예요. 집에 문제가 있어서 길에 나서는 게 아니라, 길을 나서는 게 인생이니까 집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리자는 거죠. 그렇게만 되어도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또 소위 정상적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경우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겠죠. 그저 다를 뿐이지 모자란 게 아니니까요.

나비와 전사

나는 근대를 아주 낯선 배치 속으로, 곧 '탈근대의 바다' 속으로 밀어넣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탈근대의 시공간은 앞을 향해 있지 않다. 앞이면서 뒤이고,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 위고의 말처럼 그것은 자기가 서 있는 모든 장소를 제거해버린다. 하여, 나는 그것이 근대 이전 동아시아 지성사의 '교해(敎海)'와 겹쳐지는 순간(주로 18세기)을 포착하기로 작정했다. 미래를 과거에서 찾고, 과거 속에서 미래를 보고, 그럼으로써 현재가 발 딛고 서 있는 대지를 불안하게 동요시키는 것, 그것이 이 배치가 의도하는 주된 전략이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인류가 고안해 낸 운명론 가운데 음양오행론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장점이다. (……) 가장 원대하고도 고매한 비전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공부의 달인』 책에서 쿵푸의 비법으로 ‘낭송과 구술’을 제시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 공동체에선 다양한 방식으로 이 비법을 실험한다. 낭송 오디션이며 낭송 페스티벌 등등. 다들 그렇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에 가면 독자들은 또 물었다. 낭송이 뭐예요? 낭송을 어떻게 해요? 소리 내서 읽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등등. 그만큼 우리의 독서와 공부에는 ‘음소거’ 현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공동체의 사례를 들어가며 최선을 다해 설명했지만 그래도 뭔가 미진했다. 그러다 올봄, 저 달리는 열차 속에서 한바탕 ‘일장춘몽’을 꾸게 된 것이다. 역시 인생만사엔 시절인연이 중요한 법이다. 결국 『공부의 달인』이 『낭송의 달인』을 부른 셈이다. 그럼 왜 ‘낭송의 달인’이 ‘호모 큐라스’인가? 큐라스는 케어care의 라틴어다. 푸코 강의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말이다. 『동의보감』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한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의 마지막 장에서 이미 활용한 바 있는 낱말이다. 낭송과 양생의 결합으로선 최고의 단어다. 양생의 핵심은 사계절과 함께 리듬을 타는 것이다. 낭송 또한 그러하다. 하여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모두들 고전에 담긴 소리를 통해 내가 자연 속으로, 천지가 내게로 오는 ‘천인감응’의 파노라마를 즐기시길!”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돈의 달인이란 돈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돈에 ‘먹히지’ 않고, 돈을 통하여 삶을 창조하는 걸 의미한다. 헌데, 왜 호모 코뮤니타스인가? ‘코뮤니타스’란 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뜻이다. 화폐는 탄생 이래 늘 공동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폐가 공동체적 삶의 다양성을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코뮤니타스를 특별히 “화폐에 대항하는 공동체”라고 명명하였다(고병권, 『화폐, 마법의 사중주』 참조). 화폐의 ‘식성’에 맞서 삶의 창조성을 지켜 내고자 한 것이다. 돈의 달인과 호모 코뮤니타스가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서로 반대쪽에서 출발했기 때문일까. 이 마주침에는 특유의 긴장과 스릴이 넘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든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이 책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경제학 저서가 아니다. 또 돈을 벌기 위한 처세술이나 재테크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차고도 넘친다. 정보가 부족해서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재테크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용법이다. 경제와 삶, 화폐와 일상을 구성하고 재배치하는 용법! 문탁의 말대로 이건 어디서도 배울 수가 없다. 아니, 우리 사회엔 이 배움에 대한 욕망 자체가 부재한다, 그래서 결국 두 개의 양극단을 오가게 된다. 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삶을 불태워 버리거나 아니면 ‘무소유’라는 신비롭고 초월적 장으로 도피해 버리거나. 이 책은 이 양변을 떠나 제3의 길을 찾고자 하는 갈증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자본에 포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산정으로 도피하지도 않는, 화폐와 삶이 어떻게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갈 수 있는가를 실험해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병과 몸. 지난 10여 년의 공부와 활동이 내게 던져 준 새로운 키워드다. 이 키워드들은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앎의 배치로 인도해 주었다. 인간은 앎을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 그러니 앎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병을 탐색하는 것도, 몸을 바꾸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병에 대한 탐구가 몸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는 그 즈음, 운명적으로 『동의보감』을 만났다. 『동의보감』은 조선을 대표하는 고전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명색 한국 고전문학 전공자다. 고전문학과 『동의보감』, 지척의 거리에 있건만, 유감스럽게도 둘이 교차하는 공간은 없다. 고전문학을 연구했던 시절, 『동의보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의학은 문학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의학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복속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인 공동체를 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문에 대해서는 횡단과 접속을 주장했지만 의학에 대해서만은 견고한 장벽을 세워 놓고 있었다. 하지만 병과 몸이라는 화두가 마침내 그 장벽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시점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깎이로 ‘생계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이때 둘의 궤적은 사뭇 중첩된다. 문체반정과 수원 화성 축조, 천주교 사태 등 정조의 치세를 장식하는 주요 사건들에 둘은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 대해 ‘노 코멘트’ 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은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아주 없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어 20여 가지의 환술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 이치를 안다면 지사(地師; 지관)의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정약용, 「풍수 신앙의 허구성」, 『다산논설선집』, 75쪽) 참 까칠하다. 연암을 마치 동시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에도 더러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데다, 인용한 부분도 하나같이 수레와 벽돌 등 기술지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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