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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번역

이름:배수아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5년, 대한민국 서울

직업:소설가 번역가

기타: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데뷔작
19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

최근작
2023년 7월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알라딘 한정판 북커버 에디션)>

이 저자의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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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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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여러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로 등장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고 다시 이야기의 뒤편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의 삶은, 곧 파시즘의 통치와 전쟁과 분단, 그리고 재통일이라는 백여 년 동안의 근대사 구석구석에 남겨진 개인들의 발자국이며 그림자이고, 소리 없는 무늬이자 조용한 풍경들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개인의 삶을 살며, 그것이 곧 역사가 된다. 에르펜베크의 이 책은 그런 개별화된 역사의 모습을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적 문체와 놀랄 만큼 정교하게 의도된 반복, 그리고 카메라 필름을 연상시키는 구성을 통해 독특하게 드러내 보인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이고 타협이나 화해를 싫어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냉정하고 자신은 아프거나 빚을 지거나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할 정도로 곤란에 처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종교나 도덕이나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 생물학적 성별은 female이고 나이는 33세. 독신. 건강 상태 양호. 중산층 출신이나 노동 의지와 독립심이 특이할 정도로 강하다. 어떤 점에서는 과격하기조차 하다. 이런 인물을 설정한다. 이 설정은 임의이고 독립적인 것이므로 동시대의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성격이 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하는 문제와는 물론 직접 관련이 없다. 그렇게 시작한다. (2000년 12월)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예를 들어서, 이런 방법이 있다.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타협이나 화해를 싫어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냉정하고 자신은 아프거나 빚을 지거나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할 정도로 곤란에 처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종교나 도덕이나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 생물학적 성별은 female이고 나이는 삼십삼 세. 독신. 건강상태 양호. 중산층 출신이나 노동 의지와 독립심이 특이할 정도로 상당히 강하다. 어떤 점에서는 과격하기조차 하다. 이런 인물을 설정한다. 이 설정은 임의이고 독립적인 것이므로 동시대의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성격이 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옹호해야 할 입장에 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하는 문제와는 물론 직접 관련이 없다. 그렇게 시작한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

독일의 문학계에는 조금 특별한 작가군이 형성되어 있다. 그들은 대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쳐 동독에서 출생했으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한창 예민한 십대 시절에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경험했으며, 그 이후에는 갑자기 통일된 자본주의국가에서 성인이 되어 살아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문단에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금은 독특한 시대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게 된, 지난날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1976년생 야나 헨젤, 1970년생 요헨 슈미트, 1971년생 야콥 하인, 1974년생 율리아 쇼흐, 1968년생 그레고어 잔더 등이 그들이다. 문단에서는 그들을 '장벽 저편의 아이들Zonenkinder(베스트셀러가 된 야나 헨젤의 동명의 책 이름)', '트라반트 세대(동독의 자동차 트라반트에서 따온 말. 서독의 동세대 작가군을 역시 폭스바겐 자동차시리즈 이름을 따서 골프 세대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적으로.)'등으로 부른다. 야콥 하인이 쓴 대로, 그들은 아무도 '장벽 이전'을 몰랐고 따라서 비교하거나 할 수도 없었으며 아주 가까이 있으나 어차피 가지도 못할 나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통독의 대전환 이후 이미 충분히 성인이 되어 있던 세대들이나 아주 어려서 갈등을 겪을 여지가 없던 그 이후세대들보다 더 많고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할 수 있었던 역사상 유일한 세대가 된다. 그들은 두 가지 세계의 성장기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을 그들의 세대로 명명하여, 그들을 '89세대'라 하기도 한다. / '역자 후기' 중에서

나치와 이발사

힐젠라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얼굴 피부 아래 숨기고 다니는 속마음을 투영하여 현실의 캐리커처를 그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일반적인 캐리커처가 그렇듯이 그의 소설에도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풍자가 깃들어 있다. <전쟁과 민족 말살에 대한 캐리커처>, 사실 그것은 그 자체로 소름끼치는 일이다. 힐젠라트는 반어적 충격을 노렸고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 옮긴이의 말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에 실린 글들은 모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이었으므로 내 문체와는 다르게 글들이 짤막짤막한 편이고 어느 정도 분량도 일정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구성과 화법보다는 산만하고 핵심이 분산되어 보이는, 어수선한 나열식 서술을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만약 이 책의 제목만 듣는다면 이것이 육체에 관한 칼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벌거벗은 육체를 구속하는 사회적 강박에 관한 스케치에 가깝다.

달걀과 닭

좋아하는 여성작가를 만나기 위해 마르그리트 뒤라스, 엘프리데 옐리네크, 버지니아 울프를 거쳤지만, ‘환상적인 불협화음’을 내는 리스펙토르야말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 「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을 사랑한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의 촉감을 가진 광선이 피부 속으로 곧장 들어와 나라고 불리는 한 순간을 직선으로 투과하고 빠져나간다. 나는 희고 투명하게 피폭되었다. 그런 느낌을 이 단편집 번역 작업 내내 이어졌다.

독학자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독일어를 배우고 있었다. 마지막 기간 동안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작문을 통해 독일어를 공부하는 작문수업을 받았다. 한 주일에 한 번 우리는 선생님이 제시하는 테마에 맞는 작문숙제를 제출해야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곧, 내가 원하는 문장과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의 간극 사이에서 투쟁을 벌였다는 뜻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독학자>는 그동안의 내 작문숙제에 대해서 내가 독일어로 제출할 수 없었던 보충 부분이자 한국어 주석이 된다. 성 안토니우스와 독일어 작문시간. 이 두 가지가 <독학자>를 쓰게 된 가장 강한 모티프가 되었다.

바람인형

나는 혼자다, 라는 생각을 하면 발걸음이 멈추어집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였을 때였나, 교실 맨 뒤에서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죠. 아직도 벌받고 있는 시간인가요. 정말 나는 어두운 교실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한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쳐보기도 합니다. 딩, 동, 딩, 동 어쩌면 지금의 모든 것은 꿈이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다시 아무도 없는 그 어두운 교실의 뒤편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린 나는 생각하겠죠. 아아, 정말 길고도 무서운 꿈이었어.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나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안녕, 하면서 지금의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꿈에서 깨어나서, 아니 꿈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꿈에서 깨어나면 숲에는 아름다운 야생화가 피어 있고 강물은 맑고 깨끗하게 흐릅니다. 조용하고 시원한 숲입니다. 나는 생각해요. 이제 다시는 나쁜 꿈을 꾸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꿈속에 있고, 조금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래,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는 언젠가 꿈의 이야기를 글로 쓸 테죠.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던 꿈입니다. 언젠가 한번의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다니. 정말 거리를 걷다가 발걸음이 멈추어집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았어요. 가슴 아픈 슬픔이 거리에 홍수처럼 넘쳤어도 돌아서서 꽃처럼 붉은 노을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가을이 되면 더욱 그렇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면 나느 푸른 공기 속으로 사라져간 다른 사람들처럼 없어지겠죠. 마지막으로 오래 전 아는 사람의 유리창에 빗물처럼 입술을 대고 싶어요. 1996년 9월의 어느 날 수아

불안의 글

《불안의 서》를 번역한 이후,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그 책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태어나서 책을 읽는 법을 배운 이후, 글로 표현된 예술에서 내가 느끼고자 원했던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아마도 “아름다움”일 거라고 막연히 예감한 그것이, 철저하게 무용하고 무의미할지라도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오직 순수한 언어 때문에 떨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불안의 서》에 들어 있었다.

붉은 손 클럽

<붉은 손 클럽>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연애소설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런 연애는 아주 흔할 것이다.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의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작가로서 나는 독특함이라는 표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지 독특함' 말이다. 독특하다는 그것은 작가가 마치 일기나 편지 같은 사적인 문서를 쓸 때처럼 그런 식으로 소설도 쓴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다수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도 옹호받을 수 있는 그런 글을 한번쯤은 쓰고 싶었다. 연애소설이란 그런 면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결코 연애를 즐기는 타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썼다. 연애에 관한 화제, 연애에 관한 노래, 연애에 관한 소설, 이런 것들을 나는 항상 재미없다고 느껴왔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대 평가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가 연애일 것이다. 그런 내가 연애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써버렸다. 내가 생각한 의도가 실패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패한 연애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읽는 누구도 한나를 사랑할 수 없고 연민을 가질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것은 한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붉은 손 클럽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 요리 잡지도 마찬가지며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술사는 없다. 육체의 순결을 맹세하고 살해당하는 것마저 감수한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이것을 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극도의 고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단지 언어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두 손을 끓는 기름 속에 담그는 정말, 고통 말이다. 앞으로 남은 모든 인생의 성관계 제의에 'No' 라고 말하리라는 맹세의 고통 말이다. 그토록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그리고 명분도 쾌락도 없고 섹스고 없고 표정도 없고 존재도 없는 연애가 갖는 역겨움 말이다. 그 역겨움이 꿀보다 달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공포의 가면에 입맞추게 된다. 입술이 갈가리 찢기는 피의 입맞춤이라도 결코 멈추고 싶지 않다. 아무리 치명적인 핸디캡이라도 결국은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즉, 나는 스스로, 불행해진다. 그것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더 강하다.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몸이 떨린다. 이 세상 천지에 유혹도 없다. 그런 사랑이다. 읽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블랙 샤크

이 책은 시사성을 갖춘 모험소설이며 동시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성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각 지구의 어느 한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아픈 문제를 문학이란 형태로 우리에게 내어 보인다. 범죄자는 누구인가. 해적인가, 반군인가, 총을 든 어린 소년들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단죄하는 자들인가. 과연 기부금과 구호품은 소말리아의 고통을 구할 것인가. 이 책은 피하고 싶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산책자

나는 지금도 <툰의 클라이스트>, <헬블링 이야기>, <원숭이> 등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산책>의 문장들을 접할 때면 저도 모르게 감탄과 충격의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매혹되었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

나는 도시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기차여행에 관해서, 그리고 기차에서 읽었던 책들에 관해서, 도시에 자리 잡은 방들에 관해서,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에 관해서. 여정을 문학화하는 작업의 현기증나는 아름다움에 관해서. 내가 쓰는 것은 우리 모두를 구성하는 영원한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 시작하여 어느 부분에서 끝나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나의 문학이 분절된 목소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즉 스토리를 진행하되, 오직 파열된 단면으로서 나타내기. 목소리는 음성이며, 음색이란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문장의 내용이나 문체의 스킬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그것은 작가의 지문이다.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한트케 스스로 발견한 스승, 폴 세잔. 세잔의 회화가 사물을 현실화한 방식을 따라가면서 글쓰기 미학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 작가는 예리한 언어로 커다란 아치를 그리며 느리게, 하지만 동시에 논증이나 설명을 생략하고 직접 화살처럼 사물 안으로 꽂히듯 핵심으로 진입하는 특유의 서술 방식을 통해 문학적 아름다움을 구축해간다.

아홀로틀 로드킬

청소년의 소설이긴 하지만 『로드킬』은 흔히 생각하는 성장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상당히 악마적인 정신이 내포된 글이다. 거기에 작가 자신이 타고난 천재성과 개인의 처절한 경험, 그리고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더할 나위 없이 탈일상적인 캐릭터들이 더해져서, 이 책은 어떤 무서운 것이 되고 말았다.

안데르센 동화집

"'안데르센'은 내 어린 시절의 완성이었다. (……) 나는 황홀했고, 나는 사로잡혔다. 나는 나를 잊었다. 황홀하다는 느낌, 사로잡히고, 나를 잊는다는 느낌이 최초로 내 온몸을 관통했던 아홉 살의 그날. 아마도 그때 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가 완성된 것이리라."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모든 사람이 '일반적인 것'만을 써야 한다면 아마도 내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한 전문가로부터는 '만일 네가 그랬다면, 정말로 빈곤한 것은 이 지상에서 너 하나뿐'이라는 조언을 들은 적도 있지만 뭐 나에게는 그렇다 해도 상관 없는 일이다. 빈곤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그 경계는 모호해지고 개념은 다양해져서 사회가 진보하고 복잡해질수록 빈곤 또한 따라서 팽창하는 듯하다. 게다가 심지어는 점차 추상적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빈곤의 모습들은 이것을 쓰는 내내 나를 자극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터무니없는 욕심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빈곤과 마찬가지로 이 원고를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일이다.

자연을 따라. 기초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늙었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에는 주름이 졌다. 독자는 늙어가고, 작가는 죽는다. 독자는 죽고, 작가는 잊힌다. 문학은 누구의 영혼일까.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나는 2009년 7월,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몽골로 떠나 약 한 달간 서북부 국경 지대인 알타이와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 내 느린 마음이 여전히 알타이에 거의 머물고 있는 상태로,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이어지는 2010년과 2011년 여름에도 나는 마리아와 함께 갈잔 치낙의 알타이─투바를 방문했다. 두번째 세번째 방문은 당연히 최초의 방문과는 좀 다른 경험이 되었고, 함께 여행한 일행들도 대부분 새로운 얼굴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방한복과 튼튼한 신발을 챙겨갔으며 알타이 거주 내내 가장 아쉬웠던 물건인 플라스틱 대야도 준비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아름다운 흰말을 탔고, 몽골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알타이 고원 위 외로운 유르테를 방문했으며, 불투명한 젖빛으로 흐르는 급류의 강을 보았다. 알타이의 한 마을에는 여행자들이 기증한 책으로 만들어진 유목민의 도서관이 있었다. 영어 불어 독일어 등 각 나라의 알타이 안내서들, 덴마크의 탐험기, 영국의 모험소설들. 세번째 알타이 방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시는 알타이로 가지 않으리라. 만약 내가 첫번째 여행을 마친 직후가 아니라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이 글을 썼다면, 아마도 그 내용과 느낌은 좀 달라졌으리라. 하지만 내 마음이 여전히 알타이의 언덕 뒤편에 머물던 시기에, 알타이 꿈과 주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이 글을 썼고, 완성된 원고를 교정 없이 편집자에게 바로 넘겼으며,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수년 동안 편집자의 서랍에서 숨겨져 있던 원고가 절대로 출판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 스스로도 이 원고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다시 내 앞에 나타난 이 글은 순식간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 나를 이끌었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여전히, 여행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알타이 언덕 뒤편에 홀로 남아 있는 마리아의 말머리장식호궁이다. 악보도 음표도 없는 선율이다. 문자 없이 저물어가는 그리움의 언어이다. 모든 일행들이 아이락에 취하고 있는 저녁, 텅 빈 유르테 안에 홀로 앉아 외부의 푸른 허공을 선회하는 한 마리 독수리를 지켜보는 나, 독수리가 지켜보는 나이다.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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