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오생근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6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3년 11월 <[세트] 프랑스 현대 시 155편 깊이 읽기 세트 - 전2권>

위기와 희망

문학의 물량적인 풍요로움과는 달리, 문학의 위기는 계속 심화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문학은 있어도, 감동을 주는 문학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문학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고, 구원의 빛처럼 인식되던 시절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작가들이 문학을 멀리하는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대중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문학의 대중화야말로 문학정신을 상실한 채, 문학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유종호 선생의 말처럼, “대중문화의 기고만장한 위세를 누르기 위해서는, 본격문학이 보다 압도적인 위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문학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일까? 지난번 『문학의 숲에서 느리게 걷기』라는 제목의 비평집을 펴낸 후, 8년 만에 느리게 비평집을 묶게 되었다. 그러나 느린 걸음에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란 문학이 죽음의 조건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위엄 있게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살길을 찾기보다 냉정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체념이나 절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몸은 쇠약했어도 정신은 더욱 투명해진 문학이 꼿꼿한 자세로 자기의 설 자리와 갈 길을 의식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큰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평집은 혼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들과 함께한 발걸음의 기록이다. 2011년 여름, 관악산 연구실을 떠나며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책머리에 초현실주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대학 4학년 1학기 때, 사회학을 전공한 젊은 프랑스인 교수의 강의를 듣던 때였다. 그는 교재 없이 매 시간 프랑스 문화와 사회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날 문득 자기가 좋아하는 시라고 하면서 엘뤼아르의 「자유」를 읽어주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학과에서는 20세기 불시를 전공한 교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강의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나, 보들레르에서 시작하여 발레리로 끝나는 상징주의 시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자유」를 처음 알게 된 느낌은 나에게 거의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를 들으면서였는지 읽으면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라는 구절이 스무 번쯤 반복되는 그 시에서 ‘너’가 누구인지가 제일 궁금했는데, 마지막 연의 “한 마디 말의 힘으로/나는 나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나는 너를 알기 위해서/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태어났다/자유여”라는 구절에 이르러 ‘너’가 바로 자유라는 것을 알고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구절은 내가 좋아하던 발레리의 ‘바다여!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여’(「해변의 묘지」)와 비슷하여 친숙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안다connaitre’라는 동사를 ‘함께 태어난다’는 의미로 해석한 클로델의 재담으로 말한다면, 엘뤼아르의 「자유」를 알게 된 순간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젊은 날의 나는 후회스런 행동도 많이 하고, 뉘우치는 일도 잦으면서 늘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싶은 꿈을 가졌고,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는 나’가 아닌 미래를 준비하며 ‘공부하는 나’를, ‘감성적인 나’가 아닌 ‘이성적인 나’를 만들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결심이 흔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변화의 삶을 다짐하곤 했다. 이런 착잡한 내면 속에서 엘뤼아르의 「자유」는 잠시 머물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주에서 근무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최전방 방책선 앞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가 되어 오전에 잠을 자고, 오후에는 훈련 받다가, 밤이 되면 거의 밤새도록 어둠을 응시하며 보초를 서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새도록 비가 쏟아지는 때, 기적처럼 엘뤼아르의 「자유」가 떠올랐다. 「자유」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때 기억된 것은 마지막 구절이 아니라 “욕망 없는 부재 위에/벌거벗은 고독 위에/죽음의 계단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당시의 힘든 상황에서 ‘벌거벗은 고독’의 극단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자유」의 몇 구절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 늘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거운 배낭과 무기를 들고 행군할 때, 백암산 줄기의 어느 산봉우리에서 막사 건축 작업에 동원되어 하루에도 수십 번 건축자재를 등에 지고 높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했을 때, 폐결핵 진단을 받고 우울한 마음으로 후송 갔을 때, 힘든 순간마다 떠오른 「자유」의 시 구절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군대 생활을 마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때의 절실한 느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제대 후에 대학원 학생으로 돌아가면, 엘뤼아르의 시를 대상으로 논문 쓸 것을 나와 약속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엘뤼아르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엘뤼아르를 공부하면서 초현실주의라는 거대한 산맥을 알게 되었고, 그 산맥의 중심에 브르통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게 되기도 했다. 나중에 프랑스에 유학 가서 브르통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언젠가 귀국하면 학위논문과는 상관없이 초현실주의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여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주제들인 시와 사랑, 자유와 혁명의 구호가 매력적인 이유도 있지만,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랭보의 명제와 “세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열정이야말로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종합하려는 모순되면서도 이상적인 그들의 계획은 여러 가지로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귀국한 다음에 처음 쓴 논문이, 박사 논문 안에서도 검토한 바 있는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혁명의 의미」였는데, 그 후 27년쯤 지나서 가장 최근에 쓴 논문은 사드의 혁명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쟁점이 된 「브르통과 바타유의 논쟁과 쟁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초현실주의 혁명으로부터 사드의 혁명으로 끝나는 긴 모험의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정의 한 고비였던 지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는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광기의 작가, 레이몽 루셀’ 그리고 ‘엘뤼아르의 초현실주의 시’를 주제로 한 세 편의 논문을 연이어서 썼다. 이 무렵 엘뤼아르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그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20대의 관점과 현재의 관점이 많이 달라진 것을 알았다. 그만큼 내가 변화했음을 의식하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기도 했다. 누군가 청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와 혁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벅찬 열정이 차오르는 것 같다. 이러한 감회 속에서 또한 알게 된 것이 공부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며, 또한 공부를 해야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만으로 더위를 잊을 수 있었고 잠시 행복감에 젖기도 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 이제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2010년 12월, 관악산 연구실에서

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

이 책은, 인간적 존재감과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프랑스와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현대의 역사적 상황과 산업화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문학적으로 대응하였는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쓴 논문들을 현대성의 주제로 모은 것이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