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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문성환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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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큰글자책] 사기(史記)와 가족, 고대 중국의 낯선 가족 이야기>

[큰글자책] 사기(史記)와 가족, 고대 중국의 낯선 가족 이야기

우리는 아침드라마를 비현실적 막장 드라마라 생각하고, 밤늦은 시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나의 미래가 될 현실적인 이야기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침드라마가 현실이고 미니시리즈가 판타지입니다. 아니, 이런 구분도 무의미합니다. 현실이니 판타지니 하는 말 자체가 이 둘의 특별한 정체성을 전제로 하는 듯합니다만, 사실 아침드라마나 미니시리즈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우리의 현재가 판타지 같은 현실인 것처럼 말입니다.

낭송 선어록

선은 자유이고 저항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말의 형식을 부숴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부서져 버린 자리가 이전보다 어설플 수도 있고 애써 새로 구축한 삶의 길이 더욱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말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세계에서는 씻지 못할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은 평등이다. 화두 안에서 선사들과 평범한 질문자는 사제 관계의 형식을 띠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가 위계적인 것은 아니다. 선은 오히려 위대한 것을 비천하게, 기이한 것을 평범하게 만든다. 아니 선은 위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기이한 것과 평범한 것의 가치를 비교 불가능하게 만든다.

낭송 선어록 (큰글자본)

선은 자유이고 저항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말의 형식을 부숴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부서져 버린 자리가 이전보다 어설플 수도 있고 애써 새로 구축한 삶의 길이 더욱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말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세계에서는 씻지 못할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은 평등이다. 화두 안에서 선사들과 평범한 질문자는 사제 관계의 형식을 띠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가 위계적인 것은 아니다. 선은 오히려 위대한 것을 비천하게, 기이한 것을 평범하게 만든다. 아니 선은 위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기이한 것과 평범한 것의 가치를 비교 불가능하게 만든다.

낭송 전습록

양명과 양명의 학인들은 강학講學을 통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자신들만의 공통감각을 단련시켰으며 나아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었다. 근대 이전 전통적인 교수 방식인 강학은 간단히 말해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공부 방법이다. 강학이 양명학 고유의 공부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함께 읽고 토론한다는 이 공부의 현장에서 튼튼한 학문 공동체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강학의 전통을 연장하려는 욕망에서 만들어졌다.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우리 시대에 『논어』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저는 일단 『논어』를 조금 자유롭고 편한 텍스트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어』는 과거의 폐물로 몰아내야 할 인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떠받들어질 성전(聖典)도 아닙니다. 물론 『논어』는 대단히 훌륭하고 멋진 책입니다. 저는 삼십대 초반에야 겨우 『논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 읽을수록 재미있고 새로운 뜻에 눈을 뜨게 하는 책으로서의 『논어』를 지금도 충분히 다 이해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저는 『논어』야말로 더욱 더 다양한 언어들(외국어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로 ‘다시 말해져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십대들의 언어로, 때론 직장인의 언어로, 때론 백수들의 언어로, 때론 여성의 언어로, 때론 노년의 은퇴자들의 언어로 등등 말입니다.” “『논어』는 엄숙하고 정적이고 순수한 책이 아니라 왁자지껄하고 동적이고 하이브리드한 텍스트인 것입니다. 대체로 상당히 구체적인 어떤 상황과 맥락 위에서 ‘누군가’와 나눈 말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때 말씀들은 그 상황과 맥락 위에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논어』를 성물로 취급하는 태도에는 종종 그 말씀들의 권위에 눌려 상황과 맥락을 괄호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대한 스승의 반석과도 같은 진리의 말씀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근거를 전도시키는 것에서부터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와 나누는 대화이고,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진 대화인지를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논어』 읽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古典)을 알 듯 모를 듯한 멋진 경구(아포리즘)들의 모음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책쯤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논어』는 저기 어딘가에서 진리를 감싸안고 고고히 서 있는 화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 삶의 현장(現場)과 내 삶의 언어와 격렬하게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루쉰, 길 없는 대지

“어쩌면 이 이름[루쉰魯迅]은 모든 모순형용을 현재화하는 하나의 상징기호일지도 모른다. 계몽자이자 피계몽자이고, 선각자이면서 함께 몰락해야 하는 대상인. 나이면서 너이고 네가 곧 나인. 성 안에서의 글쓰기=루쉰과 성 밖에서 들락거리던 관료=저우수런(周樹人)의 동선을 짚어보다가, 묘하게도 혼종+이질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루쉰을 알 것도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여름 땡볕을 무릅쓰고 며칠간을 걷고 또 걸으면서 루쉰의 뒷자락을 쫓아다닌 결론치고는 좀 허무하지만, 최소한 글쓰기=루쉰은 그가 걸어다닌 길(道)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의 재확인.”

사기(史記)와 가족, 고대 중국의 낯선 가족 이야기

우리는 아침드라마를 비현실적 막장 드라마라 생각하고, 밤늦은 시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나의 미래가 될 현실적인 이야기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침드라마가 현실이고 미니시리즈가 판타지입니다. 아니, 이런 구분도 무의미합니다. 현실이니 판타지니 하는 말 자체가 이 둘의 특별한 정체성을 전제로 하는 듯합니다만, 사실 아침드라마나 미니시리즈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우리의 현재가 판타지 같은 현실인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의 근대성 소설집

이 책은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에 대한 소설작품집 사용설명서의 용도로 구상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계몽기는 한국의 근대성이 현재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기원의 시공간이다. 계몽과 연애와 위생은 근대계몽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의 지식(담론) 및 사회(제도)에 관한 계보학적 탐사의 결과였다. 하지만 기원이란 곧 은폐되고 억압된다. 요컨대 근대계몽기라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 자명했던 것들이 민낯으로 등장하는 시공간에서 낯설어지는 것이다. 나는 문학의 최고 목표가 ‘떠나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떠난다는 것은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이미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좋은 문학 작품 속의 매력있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당당히 자기 삶의 외부와 접속하고 그 스스로 새로운 삶의 창안자로 우뚝 서는 인물들이었다. 모험소설을 쓰자는 말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길을 떠나는 만큼 문학은 그 스스로 자신의 지반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하룻밤 하룻밤의 이야기로 천 하고도 하룻밤의 생을 만들어 간 페르시아의 왕비처럼.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게. 문학은 머물지 않음으로써 떠나고, 떠남으로써 타자와 만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다른 삶을 창안하지 못하는 한, 한국 근대문학의 원점으로서 계몽·연애·위생 담론은 다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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