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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정서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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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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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공습하고 전면 침공을 감행하면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이 야만적인 전쟁이 정말 21세기 대명천지에 벌어질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 텐가! 이 와중에 문득문득 드는 기시감이 있었다. 이게 뭐였더라? 그리고 깨달았다. 그건 바로 소설 <동물농장>과 <1984> 속 장면들, 문장들이었다. 시대와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이 동물적, 아니 야만적이다. 조지 오웰이 그려낸 세계는 결코 허구의 세계가 아니며 단순한 비유도 아니다. 21세기를 사는 세계인 누구나 인정하듯, 이 작품의 작가 조지 오웰은 정말 천재 작가다. 그는 이 책 뒤에 실은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 성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책은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도 그 자체가 정치적 태도다.’ 이러한 인식하에 쓰인 이 작가의 작품은 실제로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실제 이 작품의 배경이 러시아였다). 동물들을 이용한 이 알레고리는 읽기에 따라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다. ‘우화寓話’만의 특징이기도하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역자의 의역도 원문 그대로의 속뜻을 따라갈 수 없다. 원작가가 쓴 서술구조 그대로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린 왕자 (역자 노트 + 프랑스어 원문 + 영역판 수록)

우리는 보통 번역서라 하면 어느 것이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심하게는 프랑스어로 쓰인 <어린 왕자>를 영문판을 보고 중역한 것을 두고도 그 내용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평론가조차 있을 정도이니, 일반 독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이방인> 번역서를 내고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대가의 번역서가 오역투성이라고 주장을 펼친 때문인데, 그때 내 번역서를 두고 한편에서는 영문판을 가지고 중역한 것이 아니냐고 극악할 정도로 몰아 부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번역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일반적인 번역서는 아마 그렇게 중역을 통해서도 가능하겠지만 불문학 최고 번역가의 문장을 지적하는 마당에 원문도 아닌 영문판 번역을 가지고 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인식 자체가 유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법 의식 있고 학식 있는 독자들에게조차도 먹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리 잘된 영어 번역서라고 해도 그건 그냥 또 다른 한 권의 번역서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원문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프랑스어 원문을 무시하고 미국에서 번역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해 읽는다면,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영어로 번역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다시 불어로 번역해 읽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 두 단계의 상이한 언어로의 변환을 거치면서 과연 원작의 의도와 뉘앙스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특히 영어에는 기본적으로 존칭의 개념이 없어서 엄연히 존칭이 존재하는 프랑스와 우리말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순한 것 같지만 평어체와 경어체가 가지는 뉘앙스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아무리 뛰어난 영어 번역자라 해도 우리 소설과 프랑스 소설을 100% 원래 의미대로 옮긴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인데, 그 기본적인 개념조차 헷갈려하고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를 조금이라도 불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 번역서 뒤에 기존 번역서의 오역을 지적한 ‘역자 노트’ 이외에도 <어린 왕자>의 프랑스어 원문과 영역판을 첨부하기로 하였다. 이제 저 셋을 비교해 보면 함께 실은 <어린 왕자> 본문이 언뜻 보면 기존 번역서들과 비슷한 것 같지만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직역’을 한 것인데, 원작에 없는 부사와 형용사, 접속사 등을 역자 임의로 넣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역으로 그와 같은 것을 임의로 뺀 것도 하나도 없다. 심지어 쉼표까지 맞추려 노력했다.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번역서보다 잘 읽히며 원래의 감동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직역’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번역된 본문을 뒤에 실은 원문과 영역판을 대조해 보면 확실히 알게 될 터이다(알파벳만 알고 사전을 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프랑스어 원문과 영역판이 어떻게 다른지도). 우리는 오히려 작가의 문체를 유지하려는 직역을 아마추어 번역으로 터부시하고, 그럴듯한 윤문이 들어간 의역을 잘한 번역으로 여기는 이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의역이 심하다는 것은 오히려 역자가 그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해 연결이 되지 않으니까 임의의 수식어나 접속사를 통해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작의 의도를 어떻게 타 언어로 제대로 전달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하여 그나마 원작의 의도와 감동을 해치지 않는 방법은 직역밖에 없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닌 것이다. <이방인>에 이어 <어린 왕자>의 번역을 마치고 새삼 든 생각이다.

어린 왕자로부터 온 편지

모든 어른들도 처음에는 아이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이 같은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똑같은 현상이 왜 어른과 아이의 눈에는 다르게 비치는 것일까요? ‘어린 왕자’의 정신은 그 비밀을 알려주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번역은 작가의 본심을 읽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위대한 타인의 정신을 읽는 일입니다. 수백, 수천 번을 고쳐본다 한들 그 마음을 그대로 옮겼다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그것을 해냈다는 확신과 대면하는 행위, 그것이 번역일 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양장)

우리는 일반적으로 번역에 있어서 ‘의역’에 너무 관대하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처음 공들여 옮긴 번역이 긴 시간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번역이라기보다는 그 번역을 참조한 ‘번안’ 혹은 ‘표절’된 번역서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서만도 60여 종이 넘는 모양이다. 한 책을 두고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토대 역시 바로 ‘의역’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 번역을 한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번안하고 표절하면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지적을 당한 당사자가, 혹은 그 출판사가 그냥 ‘의역’이라고 주장하면 속수무책인 게 또한 우리의 번역 현실인 것이다. 실제로 번역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을 두고 베끼다시피 한 번역서가 역자의 이름과 출판사의 마케팅에 힘입어 당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현재 시장에서 가장 잘된 번역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인 것이다. 사실 이건 독자들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실제 그런 행위에 분노하고 감시해야 할 평론가조차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거의 살펴볼 생각을 않고, 그게 그거려니, 그냥 약간의 윤문 차이겠거니 여기며 그 책을 낸 사람과 출판사의 권위만 가지고 추천을 하는 마당이니, 독자들이야 당연히 번역은 그게 그거겠거니 오해하고, 오역투성이 번역서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고는 감동한 척,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척 포즈를 취하거나 자신의 독해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윤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숱한 ‘번안’과 ‘표절’은 애초에 정확한 번역이 나와 있는 상황이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정확한 직역이 이루어진 다음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려 한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는 이유인 까닭이다.

이방인

번역, 그후 역시 카뮈다. 오랜만에 다시 봐도 가히 압도적이다.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것도 신기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자신의 이야기인 양 생생하기만 하다. 2014년 기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하고 어느새 8년이 흘렀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역에 대한 내 지적을 두고 당시 출판사 대표였던 내가 ‘자기 책을 팔아먹기 위해 노이즈 마 케팅을 펼친 것’이라느니, 우리 시대 번역의 대가인 ‘어른’을 욕보인 부도덕한 행위라느니, 누군가는 프랑스 현지의 카뮈 전문가에게 문의했더니 엉터리라 했다고(우리말 번역의 잘잘못을 프랑스인에게 묻는다고?) 페북 화면을 캡쳐해 올리기도 했다. 물론 처음한 내 번역에 부족함도 많았을 테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당시까지의 우리 인식(번역은 의역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 말이다)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22년 오늘, 난무했던 인신공격성 글은 지금도 여전히 SNS 속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해당 역자는 조용히 개정판을 내고(언론 기사로 알았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그 사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길은 없다. 다만 여전히 최고의 번역처럼 떠받드는 ‘그분’의 책에 달리는 독자 리뷰들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오해는 여전한 듯하다(그 오해는 뒤에 ‘해설’로 정리해 두었다). 물론 나 역시 다시 볼 때마다 그전에 몰랐던 부분, 틀렸던 부분, 서툴렀던 부분이 매번 새롭게 보이곤 하니(이 책은 유독 더), 바른 번역, 완벽한 번역을 한다는 것이 결코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깊이 절감하고 있기도 하다. 출판사에서 앞선 책(보급판) 재쇄를 찍어야 한다고 봐달라고 했을 때, 불현듯 깨달은 오류가 있어 보류시켰던 게 지난해 초다. 매일매일의 재촉을 다른 일을 핑계 삼아 미루고 미루다 보 니 또 한 해를 넘겼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달려든 끝에, 마침내 이제야 다시 펴내게 되었다. 카뮈 <이방인>을 읽는 데 있어 반드시 기억해 둘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앞서 <이방인>을 읽었다 해도 이 말이 가슴에 저절로 와 닿지 않았다면 그건 카뮈 <이방인>을 읽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022. 1. 25. 이정서

킬리만자로의 눈

헤밍웨이에 대한 ‘의심’에서 ‘확신’에 이르기까지 “번역은 직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직역의 의미는 ‘작가가 쓴 문장의 서술구조를 살려주는 번역’을 의미한다. 동사는 동사대로, 수식어는 수식어대로, 쉼표는 쉼표대로, 원래 작가가 쓴 문장 성분을 무시하고 의역하면 원래의 의미가 변질될 것은 당연하다.” 이런 주장을 처음 펼치며 번역의 세계에 뛰어든 지 어느새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나름 저 원칙을 지키며 여러 책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과정 중에 수없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회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초기의 번역은 서툰 점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번역을 할수록, 원래 작가가 쓴 문장 성분을 그대로 살리면서 번역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확신은 무엇보다 ‘헤밍웨이’를 만나고부터였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단편집들을 보면서, 이게 정말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맞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한마디로 ‘실망스럽고’, 의심스러웠습니다. 작가 자신을 주인공 삼았다는 대표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컸습니다. 도대체 작가가 무슨 소리를 하고자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 단편을 번역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원문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심’은 역시 번역에 있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단편들은 원래 작가가 쓴 문장 그대로 번역하는 것과 번역자 임의로 의역한 문장이 결국에 얼마나 내용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들은 기존의 헤밍웨이 번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헤밍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투명인간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차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냥 눈으로 원서를 읽는 것과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 번역하는 일은 큰 차이가 있다. 웰스의 문장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번역을 끝냈는데, 정말이지 갈수록 이 독특한 내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번역을 끝내고 무심코 비교해본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혹시 몰라서 비교해본 결과 내가 원본으로 삼은 책과 처음 영국에서 출판된 원본의 결말 문단이 현저히 달랐다. 나는 그날로 미국 판과 영국 오리지널 판의 대조를 시작했고, 전체를 대조한 끝에 많은 곳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차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 차이를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번역서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차이가 얼마나 현격한가를 독자들은 알게 되리라 믿는다.

투명인간

이 책을 처음 들여다본 게 아마 5년 전이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에도 없다. 누군가의 권유로 출판사 블로그에 연재를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몇 회를 연재하다, 포기하고 말았었다. 만만하게 달려들었다가 정말 큰코다친 격이었다. 고어와 사투리는 둘째 치고, 은유와 비유를 사용한 문학적 문장들 하나하나가 결코 간단치 않았다. 그리고 잊고 있다가 다시 몇 해가 지나 들쳐보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던져두었었는데, 결국 지난해, 어느 책에서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이 ‘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세계와 사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글을 보고, 부쩍 호기심이 생겼고―『동물농장』과 『1984』를 번역까지 한 내게 『투명인간』의 작가가 그렇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기에―다시 들쳐보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음에도 웰스의 문장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무튼 그럼에도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번역을 끝냈던 것인데, 번역을 끝내고 무심코 비교해본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내가 대본으로 삼은 책과 인터넷에 올라 있는 PDF 파일 원고의 결말 문단이 현저히 달랐던 것이다. 나는 종이책은 미국 펭귄북스판을 가지고 있었고, PDF 파일은 ‘오리지널’이라 표기된 파일을 인터넷에서 찾아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같은 영어이니 그게 다를 수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영국 런던의 지인에게 그곳에서 오리지널로 인정하는 판본을 구해달라 부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영국에서 읽히는 ‘오리지널판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책은 역시 어떠한 첨가물도 부가되어 있지 않은 원문만 그대로 인쇄된 책이었다. 나는 그날로 미국판과 대조를 시작했고, 전체를 대조한 끝에 총 7군데가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 차이는 뒤의 ‘해설’에 상세히 밝혀두었다). 번역을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이 그렇듯, 당연히 오리지널판본이라고 특별날 게 없는 것이 내가 인터넷 파일로 받아 번역한 판본이 바로 오리지널 ‘원본’이었으므로. 이 과정을 겪으면서 실상 나는 크게 놀란 것은 아니다. ‘번역’이라는 세계에 뛰어들고 난 이후, 나는 너무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들이 정말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숱한 철학자들이 세상의 진실을 좇았지만, 사실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이 전부 즐거운 일만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경험하였다. 예컨대 내가 읽은 모든 책이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글을 쓰는 데 있어 외국 누군가 했다는 말을 (원본을 확인하기 전엔) 절대 인용할 수 없게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출간 이후 그 기라성 같은 작가들, 작품들의 틈바구니에서 4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런던의 지가를 한껏 올렸던 『투명인간』이 왜 우리에게(혹은 미국에서) 별것 아닌 책처럼 여겨졌었는지 의아했던 분이 있다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2. 1. 이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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