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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전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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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장의 무늬들

사랑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낡아간다 무릎의 흔적들을 본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새살이 올라오며 만든 무늬들 속에 유년의 달음박질과 엉뚱한 실수와 아찔했던 사고의 정지화면이 들어 있다. 촛대뼈의 우묵함은 병영 시절 허락도 없이 내 전신을 휩쓸었던 폭력의 발자국이다. 상처에서 솟아오르던 통증들이 다 휘발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그 자리를 흉터라고 부른다. 인터넷 시대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흉터란 일상과 함께 하는 팝업이다. 클릭하는 순간 실행되는 영상이다. 어느 날 문득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장착된 USB다. 눈으로 흉터를 본다는 건 클릭하는 것과 같다. 자동으로 폴더들이 펼쳐진다. 자주 클릭하는 건 아무래도 사랑이라 명명된 폴더다. 그 내부에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파일들이 존재하고 모양도 자료량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것은 열리는 순간 댐이 터지듯 방 안의 모든 것이 둥둥 떠오르고 나만 바닥에 가라앉아 익사 직전까지 허우적거리게 된다. 다른 폴더를 클릭하면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들이 미라처럼 나란하다. 그렇지, 눈물로 염장되었으니 쉽사리 변질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나는 상처와 치유를 반복하며 견딘다. 삶이 그런 거라고 내 스스로를 다독인다. 상처는 두려움을 버리고 정면으로 응시할 때 비로소 새살을 밀어 올리기 때문이다. 때론 돌아보며 앞을 예감하고 앞을 보며 흐트러진 지난날들의 부스러기들을 마음의 서랍, 제자리에 담는다. 종교가 스승이고 학자도 스승이고 스치는 모두가 스승일 수 있으나, 항시 함께해주는 스승이란 자기 자신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일 뿐, 쓰라림의 진원이 어디인지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미혹에 빠지는 경우가 점차로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풍경과 기억과 상처와 상상들을 문장으로 옮겼다.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세밀화로 남겼다. 사람 하나 일어선 자리에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채집했다. 나의 이야기이고 그대들의 사랑이고 누군가의 추억이며 우리 주변에 서성거리는 안색이다. 어느 갈피에선가 눈가에 달무리 진 사내를 만난다면 그대의 자화상이니 외면하지 마시라. 혼자 앉은 카페의 흐린 창에 비친 얼굴이 바보 같아도 아름다운 자신이니 가늘게 웃어주시라.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두 번째 시집을 엮으며 내가 애면글면하는 힘의 원천이 궁금했다. 욕망의 힘이라면, 감염됐기 때문이라면 비겁한 대답이다. 나는 안다. 문장 앞에 좌절을 거듭하며 그 안에서 희열을 느낀다. 희열을 느낄 때까지 좌절했다. 도무지 오를 길 없는 절벽 앞에서 갑자기 터지는 웃음 같은 것, 쓰다가 죽겠구나 싶을 때의 막막함 뒤의 평온함 같은 것이 내가 맛본 희열이었다. 결국, 나는 어느 시집의 갈피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백골로 발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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