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10대였답니다. 풋.
그때는 참, 세상만사. 어찌 그리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존심에 멍이 들곤 했지요. 나 자신을 쓰레기처럼 툭,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들더라고요.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이, 내가 부를 때면 아무리 깜깜한 밤에도 스스로 나타나서 나를 붙들어 주고 위로해 준 이가 누구였게요?
바로 '마흔 살쯤 넘은, 늙은 나' 였어요. 풋. 마흔이 엄청 멀고 먼 나이인 줄 알았지요. 그때는.
저는 사는 일에 너무 지쳤다 싶을 때마다 옛 책을 들추어 덴동어미의 말을 곱씹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왜 살다보면 더러 그런 때가 있잖아요.
소금밭에 한 번 굴렀다 집어넣은 듯 눈알이 아리고 뻑뻑할 때.
온몸의 뼈마디란 뼈마디는 죄다 매가리가 풀려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때.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려서 인간이란 종자가 아주 바짝 말린 오징어 짝 나버렸으면 싶을 때.
피곤에 겨워, 운전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관성적으로 가속기를 밟았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는, 무지 막히는 퇴근길의 자동차 계기판에서 문득 ‘기름 없음’ 표시가 깜빡거리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삶이 그렇듯 소진消盡 직전에 있을 때.
그럴 때.
(…)
4·4조 음률에 맞춰 웅얼웅얼 읽다보면, 희한하지요, 제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하루인 오늘, 오늘을 ‘꽃빛일랑 곱게 보고 새소릴랑 좋게 들으며’ 즐기려는 마음자리가 슬그머니 생겨난답니다. 오래된 어머니가 전하는 지혜의 말씀이, 마치 마술처럼, 제 마음의 구멍에 대롱을 끼워 다시금 생生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거예요.
《물의 말》은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썼다. 어린애 둘을 키우며 박사과정까지 밟던 중이어서 엄청 피곤하고 힘들 때였는데, 어떻게든 시간을 여퉈내어 쓰고 또 썼다. 남이 억지로 시켰다면 못 썼으리라. 내가 쓰고 싶어서, 안 쓰고는 못 배기겠어서 썼더랬다.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침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는 틈틈이 물기도 마르지 않은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억.
(…) 나는 20년 만에 내 소설 《물의 말》을 남의 소설처럼 읽으며 더러 울었고 더러 심장을 떨었고 더러 킥킥거렸다. 어떤 인물의 목소리는 생생한 음성지원까지 되었다.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목소리들이 도란도란 수런수런 깨어났다. 나를 이 얕아빠진 일상에서 건져내어 더 풍요롭고 더 깊이 살게 하는 목소리들이…….
《물의 말》은 시쳇말로 내 취향을 저격했다. 독자 여러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 개정판 작가의 말
살다 보면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지요. 어떤 때는 똑똑이, 어떤 때는 바보. 어떤 때는 애늙은이, 어떤 때는 철부지. 어떤 때는 십 리 눈치꾸러기, 어떤 때는 구제불능 미련퉁이.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라는 생각, 정말 많이 해 봤을 거예요.
여러분 속에는 그토록 많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능성들이, 제가끔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자, 누구를 불러낼 거예요?
누가 여러분의 소중한 삶을 이끌게 할 참이에요?
볕 좋은 오후, 툇마루에 앉아 방금 감은 머리를 참빗으로 알뜰하게 빗어 내리며 일가 큰언니가 말했다.
잡념을 버려라. 원래 이루어지지 않게 돼 있는 것을 꿈꾸지 말고 바라지 마라.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살아도 허방 집기 쉬운 게 삶이야.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래. 그러니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원래부터 하나도 없는 거야. 바보야, 너라고 무어 다른 게 있을 줄 아니?
마흔 어름에 원형 탈모와 잇병으로 할머니가 다 된 섬 색시가 큰언니의 뒤웅박에 담긴 생의 모습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언니들, 아우들에게 말하고 싶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삶이 있다면 그렇게 살려므나. 소설처럼.
아줌마는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 어린이, 친구가 많아도 진짜 친구는 없는 어린이, 또 다른 친구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어린이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어. 아줌마는 말이야. 너희들 모두가 자기 마음도 들여다볼 줄 알고 다른 사람 마음도 들여다볼 줄 아는 그런 좋은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어,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