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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국내저자 > 번역

이름:조영일

직업:문학평론가

최근작
2023년 11월 <힘과 교환양식>

문자와 국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확실히 전전의 사고들(즉 1930년대 일본사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논하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 역시 일종의 ‘전전의 사고’라는 것이다(저자가 굳이 < >로 전전을 감싼 것은 그것이 과거가 아닌 현재라는 의미에서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을 전전(전쟁 직전)으로 간주하는 것은 가정 중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가정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라타니 사상의 특징 중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항상 극단적인 케이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슈미트나 하이에크에 주목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케이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사고실험’을 의미한다. -<옮긴이 후기> 중에서

사이토 다카시의 공부의 힘

사이토 다카시에게 있어 ‘교양’이란 순전히 삶의 질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네 삶을 한층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공부들과 전혀 다른 무언가를 공부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그가 추천하는 많은 도서들은 기존의 우리가 읽고 공부해온 것들과 대부분 겹칩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이 책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이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공부에 대한 태도를 바꿔라! 즉 주체적으로 공부를 하고, 공부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세계문학의 구조

<세계문학의 구조>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장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내용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세계문학의 일부로서만 ‘한국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느 비평집과 비슷한 것을 생각한 독자들이라면 당혹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든 처음은 어색한 게 아닐까? 앞으로의 내 작업은 아마 그런 당혹스러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백낙청 선생은 최근 저서에서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로서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인문적 교양의 기본이 문학비평적 능력’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문학비평가이고자 하는 이유는 ‘문학비평만이 유일하게 문학적인 것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가라타니 선생에게서 배운 것으로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최근에야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세계문학의 구조>를 통해 비로소 ‘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머리에>에서)

자연과 인간

《세계사의 구조》를 읽기 위한 워밍업으로 《인간과 자연》을 활용할 수 있다. 역자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강연문체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세계사의 구조》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도 큰 무리가 없이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에는 최근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환경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세계사의 구조》를 보충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가급적 《세계사의 구조》이후에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저자가 쓴 대부분의 글이나 저서가 그러하듯 굳이 순서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실제 이 책 곳곳에서 《세계사의 구조》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적절히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거스르며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에는 다음에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는 전제가 달릴 것이다.

정치를 말하다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수동적 위치에 안주할 수 없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 즉 불필요한 신조어를 남발하여 그것에 적응하는 것을 ‘사상의 핵심’인 양 착각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의 즐거움은 다른 한편으로 어려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이토록 능동적 위치를 강요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라타니 사상의 명료성이란 곧 우리의 능동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영역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제국의 구조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비평가를 찾기 힘든 이유는 비교적 명백하다.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비평가의 미덕으로 간주되고 장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일본비평가와 한국비평가의 차이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역설이 존재한다. 즉 일찍이 이어령은 일본문화의 핵심을 ‘축소지향’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했는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국형’ 비평가들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일본적이라 할 수 있고, 가라타니도 “마르크스는 독일인으로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일본인으로서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는 이제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일본 독자만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가 다루는 것도 일본적 상황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 문학비평이 가진 독특한 위상과 관련이 있다. -<옮긴이 후기>에서

존재론적, 우편적

아즈마 히로키의 저작군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상은 그저 한 권의 저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오해되듯 이 책 이후로 그가 무거운 주제(철학, 사상) 대신 가벼운 주제(서브컬처)로 전향했기 때문도, 사실상 진지하게(학술적으로) 다룰 가치가 있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인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전향’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전향과 유사한 것(하이컬처→서브컬처)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선언하는 전향서로 <존재론적, 우편적>을 읽어야 한다. 이 점을 놓치면, 이 책은 기껏해야 일본인이 요령 있게 쓴 데리다 연구서 중 한 권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옮긴이 후기>에서

직업으로서의 문학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문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들입니다. 단 누워서 침 뱉기이기 때문에 애써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소위 문단 바깥에 있는 사람, 예컨대 문학 지망생이나 일반 독자들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부각된 지망생과 문인(학생과 선생) 간의 성범죄 문제도 이런 무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취미로서의 문학’으로 충분히 만족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런 고찰에 흥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설사 제도가 생산하는 환상 속이라고 해도 즐거움만 찾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진지한 관계를 맺길 원하는 지망생과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의 작가들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이기 전에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문학을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등단을 하고, 또 문단의 스타가 될 수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문학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는 줄 것으로 믿습니다. 세상에는 살아남는 것보다 슬퍼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철학의 기원

<철학의 기원>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일찍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한국문학계에 준 것과 유사한 충격을 한국 철학계에 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것은 이 책이 단순히 ‘철학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고 있기 때문도, 한동안 잠잠해진 반플라톤주의를 담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다소 시대착오적인(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선의 정치형태로 간주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사고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학과 그 적들

나는 문단문학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한국문학이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너부터 이 바닥을 떠나라. 정작 자신은 이곳에 머물면서 비판만 일삼는 것은 결국 너의 비판이 스스로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런 추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겨운 오해를 위해 확실히 말하지만,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 (....) 쉽게 말해, 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문학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문단문학이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다. 이는 오늘날 종언에 이른 것은 문단문학이지 한국문학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문단작가들에 대한 기대는 접었지만, 기존의 문단시스템과 무관한 곳에서 각자의 활동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 문학도들에게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헌법의 무의식

옮긴이에게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지금까지 그가 쓴 글을 모두 찾아 읽고 십여 권 정도 번역해왔지만 <헌법의 무의식>만큼 감동을 준 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독서경험에서 명석한 논리와 기발함으로 놀라움을 주거나 흥미로운 전개나 박식함으로 즐거움을 준 책은 적지 않았지만, 감동을 준 책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인데, <헌법의 무의식>이 바로 그러한 책들 중 한 권이다. 물론 그의 주저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사의 구조> 그리고 <제국의 구조>이다. 하지만 누군가 가라타니 고진을 읽기를 원한다면 소위 대중서로 분류되는 얇은 책인 <윤리21>이나 <세계공화국으로>, 또는 <정치를 말하다>나 <헌법의 무의식>을 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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