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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채운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0년

최근작
2022년 4월 <예술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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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개념어 특강 : '재현이란 무엇인가' 채운 선생님 인터뷰 (추천0,댓글0) 알라딘공부방지기   2009-12-15 06:19

"완전한 사랑? 이상적 삶? 망상을 깨고 새롭게 사랑하며 살기"

<재현이란 무엇인가>의 강사 채운 선생님의 인터뷰입니다. 본 인터뷰는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제공합니다.   

들뢰즈, 플라톤, 불교 선사들, 여러 화가 등 동·서양 사상에 능통하신 느낌입니다. 어떤 공부를 해오셨나요?

미술사를 전공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걸 생각해 보면 직선으로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돌아서 오고, 와 보면 내가 와야 될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공부란 게 선으로 치면 직선이 아니고 나선을 그리면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미술사) 공부를 했을 때, 답답했던 게… 순전히 양식사였다는 거다. 난 미술을 통해서 세계를 보고 싶었는데, 미술만 보게 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대학원 1년 다니다가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을 공부하러, 그 당시에 ‘서사연’(서울 사회과학 연구소)이 란 곳에 갔다. 거기서 처음 만난 게 들뢰즈였다. 꾸역꾸역 그 세미나를 따라가면서 들뢰즈가 언급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D. H. 로렌스, 헨리 밀러, 카프카……, 아무튼 들뢰즈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을 소개받은 거다. 그러다가 고미숙 선생님이 계신 수유 연구실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근대’와 접속하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들뢰즈나 푸코나 근대적인 사유를 비판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미술과 조금씩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미술사 공부를 이제 조금씩 해야겠다고 돌아와서 보니까, 내가 미술로부터 굉장히 멀어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와 있더라. 그렇게 공부 시작하고 한 7~8년쯤 됐을 때, 근대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힘을 못 갖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하고 난 다음에 뭔가 새로운 비전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그런 비전을 찾지 못하니까 답답했던 때였다. 그때 연구실에서 ‘고전’ 공부와 접속하게 되었다. 옛날에 내게 안 보이던 사유들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아, 내가 근대 공부(비판)하다가 탈근대적인 사유만으로 설명이 안 되던 것이, 고전하고 접속이 되면 얘기가 많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재현’ 개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재현’이라는 말 자체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다. 권력 같은 말은 개념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많이 쓰는데, ‘재현’은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굉장히 개념적이고, 어려워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삶 속에 뿌리깊이 이 사유가 있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들뢰즈와 푸코를 공부하면서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네들이 선언하기를, 플라톤주의를 뒤집는 게 현대철학이다. 근데 플라톤주의가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 너머에 뭐가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유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아주 좋기도 하고, 사랑의 결이 갖는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는데) 더 완전한 사랑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이게 우리가 갖는 재현적인 사유 방식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 말고 더 완전한 무엇. 지금 여기서 사는 삶 말고, 진짜 완전한 삶. 이런 나 말고 정말 완벽하고 이상적인 나. 이게 현실의 지평으로부터 계속 떠나가는 거다. 이게 다 재현이다.

이게 미술과 연결이 되면… 우리가 보통 예술을 접할 때, 뭘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동원해서 그 그림을 본다는 거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몰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 휘청거릴 정도로 매력을 느낄 때가 있고, 아무것도 몰라도 싫을 때가 있다. 그게 현장에서 느껴지는 어펙션(affection)이고, 기운의 장(場)이 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을 볼 때는 우리가 뭘 알고 있는 대로 보려고 하거나, 알고 있어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는 재현이라는 게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를 아주 떨어뜨려 놓고 생각을 하는 거다. 창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예술 작품을 창작할 때 예술가가 표현하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짜로 현장 속에서 미술, 음악이 나하고 만났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유하는 게 아니라, ‘저게 뭔가’를 사유하게 된다. 그래서 계속 멀어진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런 재현적 사고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이 대답에서 “이건 아니야, 이런 세상이 있어.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재현적 사고와 결국 똑같다. (웃음^^)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뢰즈에 휘청거렸던 이유는 ‘그래서 어떻게 해라’라는 말이 없다는 거다. ‘그래 알겠어, 근대가 이러저러해,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 그래서 어떻게…?’라고 하는 것을 들뢰즈가 얘기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걸 얘기하는 순간 또 그게 모델이 되니까. 찾고 발굴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우리에게 준 거다. 뭔가를 공부했으면 ‘이게 아니다’라는 걸 알았으면 ‘아니다’라는 걸 안 자리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물어봐라, 나는 이게 들뢰즈의 사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게 뭔지 너무 답답했을 때, 그때 고전을 만난 거다. 고전의 사유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것들이 있었다. 깨달은 사람의 세계도 따로 없는데, 그래도 깨닫기 전과 후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거다. 그런데 깨달은 후의 삶이 어떤가는 아무도 얘기해 줄 수 없다, 깨달은 사람도 얘기할 수 없다. 비재현적인 사유라는 건 뭐냐, 재현적인 사유를 넘어선다는 게 뭐냐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새롭게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비재현적인 사유를 하고, 비재현적인 삶을 산다는 게 생뚱맞은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온갖 모델과 망상들을 깨는 거다. ‘아,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문득문득 깨달아 가면서 배우는 것. 그게 비재현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 채운 선생님 소개   

 

1970년생. 공식 ‘전공’은 근현대미술사. 하지만 수유너머에서 멋진 스승과 벗들을 만난 이후로는, 전공과 그닥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공부와 강의와 글쓰기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공부가 구원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다. 올해 가장 큰 사건은, 든든한 사우(師友)들과 함께 춘천에 <수유너머 강원>을 연 것.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건강해진 것!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게 공부하면서 내 공부로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는 게 내 꿈이다. 지은 책으로는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2007),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2007),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공저, 2008)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에드바르 뭉크—세기말 영혼의 초상』(2008)이 있다.

 


저자의 글

'예술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예술은 나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게 이 책 전체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일상 속에서 예술을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조우할 수 있을까?

과거의 예술 속에서 현재적인 실험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예술을 생각하기, 예술이라는 이름은 버려도 좋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만드는 대신, 그 경계를 허물고 예술을 일상의 삶이 되게 하자.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프롤로그 중에서)
 
 

재현은 고체 상태의 세계를 꿈꾼다. 각이 딱 들어맞는 단단한 육면체들의 세계. 걸으면서, 걸음과 함께 펼쳐지는 여러 길들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어딜 가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세계. 재현은 주어진 구조에서 출발한다. 표준, 평균치, 원점에서. 그 구조 밖으로 이탈하는 것, 기원 없이 시작하는 것, 정처 없는 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만남과 사건을, 포뇨의 대책 없고 목적 없는 사랑을, 거위의 물 위의 비행을.

주어진 것 안에서 평균적인 욕망을 갖고 다수적 개념을 재현하기를 강요하는 재현의 세계에는 길이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걷는 몇 개의 뻔한 길 말고는. 하지만 사유와 삶,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노 디렉션, 홈. 집으로 가는 길 없음. 막다른 골목, 혹은 여러 갈래 길. 이 길 위에서, 알몸인 채로, 재현과의 전투를 시작해 보자.

(『재현이란 무엇인가』,「머리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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