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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량치차오 (梁啓超)

국적:아시아 > 중국

출생:1873년

사망:1929년

최근작
2020년 1월 <음빙실자유서>

량치차오(梁啓超)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이끌어간 대표적 지식인이다. 신문·잡지 및 교육을 기반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선전함으로써 폐쇄된 근대 중국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을 일으켰다. 특히 탁월한 계몽주의 사상가,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문학가로서 중국 문화사文化史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字는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이며, 필명筆名으로 음빙실주인飮氷室主人·음빙자飮氷子·만수실주인曼殊室主人·신민자新民子·소년중국지소년少年中國之少年 등 여럿을 사용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던 광둥 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으로, 반경반독半耕半讀의 향신鄕紳인 아버지 량바오잉梁寶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치同治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 뒤, 서구 충격이 중국을 향해 거세게 가해지던 시기다. 여섯 살에 오경五經을 완독하고, 열두 살에 수재가 되었으며, 열일곱에 거인擧人이 된 천재였다. 하지만 1890년 회시會試에 낙방하면서 실의에 빠진 그가 새롭게 성장한 계기는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와의 만남이었다. 신학문에 눈뜬 그는 1895년 당대 뛰어난 대학자 캉유웨이를 도와 《만국공보萬國公報》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들어선다.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 이른바 ‘백일유신’을 시작했으나,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서양 사상을 접하며 쓴 글들을 자신이 직접 창간한 여러 잡지에 연재하면서 그의 명망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청의보淸議報》에 실린 글들은 뒷날 《음빙실자유서飮?室自由書》 편찬으로 이어졌다. 중국 내외에서 ‘언론계의 총아’,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린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음빙실자유서》는 구학문에 대한 탄탄한 기반을 지닌 량치차오가 망명지 일본에서 신학문을 왕성하게 섭취하며 동서 사상의 가교를 구상한 책이다.
신해혁명 다음 해인 1912년에야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정부에서 사법총장司法總長, 폐제국총재幣制局總裁, 재정총장財政總長 등 각종 직책을 맡아 정치 활동을 했고, 말년에는 중국의 역사와 학술을 중심으로 한 연구 활동에 주력했다.

그 밖의 주요 저술로는 《소년중국설少年中國說》, 《중국역사연구법》,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신민설新民說〉, 《리훙장전李鴻章傳》 등이 있으며, 량치차오가 생전에 편찬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에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단편들이 더해져 《음빙실합집飮氷室合集》(중화서국, 1936)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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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리훙장 평전> - 2013년 1월  더보기

중국에는 리훙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상당히 많다. 나와는 정적(政敵)이고, 사적인 친분 또한 깊지 않기 때문에 그를 변호해주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그를 변호하거나 그를 위해 해명하는 말이 많다. 심지어 일반적인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렇게 쓴 까닭은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쓰는 인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고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저명한 영국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화를 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그리라.”고 말했다. 내가 쓴 이 책은 분명히 글래드스턴에게는 꾸지람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리훙장이 이 책을 알게 된다면 지하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녀석, 나를 이해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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