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

이름:전소영

최근작
2024년 4월 <화두와 여정>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이 분야에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옵션 설정
25개
1.
  • 토성의 겨울 
  • 김갑용 (지은이) | | 2022년 5월
  • 14,000원 → 12,600 (10%할인), 마일리지 700원 (5% 적립)
  • (1) | 세일즈포인트 : 78
  • 양탄자배송
    5월 7일 (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토성의 겨울』에 수록된 많은 이야기가 소설에 대한 소설, 또는 소설가 소설이지요. 소설(글)을 쓰려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 (불)가능성이 타진되는 소설이 많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일단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매시간 변화하고 늙고 성장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러니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모른다’일 것입니다. 기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사람처럼 불확정적인 존재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로 정형화될 수 없으며 질서 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바로 그런 ‘사람’, 또 ‘사람의 삶’을 가급적 그 자체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살아가는 일이 철저히 홀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면, 불안을 감수하면서 미지의 누군가를 마주할 작은 용기가 우리로 하여금 남은 시간을 다시 걸어가게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 만난 우리가 이제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러니 이 앎이 흐려질 어느 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또 다른 여행의 출발점에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3.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반복되는 각자의 일상에 갇혀 이 사회가 선로에서 이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볼 겨를도 없는 삶을 위한 경적. 때로 소설은 이와같이, 보고도 볼 수 없는 인간을 위한 소음이 되기 위해 날카롭게 벼려지기도 합니다.
4.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 이 책의 전자책 : 7,000원 전자책 보기
이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르는 서슬 퍼런 시의 말들이 따갑되 따뜻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것이 선언이 아니라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부터 돌아보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먼저 내보일 수 있는 사람. 내가 잊은 사람들의 삶이 지옥이라면 내 삶도 감히 천국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 바로 그가 신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나의 행복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불행을 향해 보내는 사죄입니다. 끝나지 않을 흑야의 고해성사입니다.
5.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인간의 의미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공간, 여백이라 불러도 좋고 무어라 불러도 좋은,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그 공간에 있다.”(「배회」)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 타인에 대한 돌봄이 낡은 유물 같아진 시대에 보기 드문 유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 세계의 것 같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이 세계에 도래하면 현실의 비참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이야 얼마든지 비루해져도 좋으니 그런 것, 한번쯤 보고도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비참해질 것을 각오하고 거듭 적겠습니다. 옮겨낸 소설들, 다 사랑 소설입니다.
6.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인간의 의미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공간, 여백이라 불러도 좋고 무어라 불러도 좋은,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그 공간에 있다.”(「배회」)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 타인에 대한 돌봄이 낡은 유물 같아진 시대에 보기 드문 유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 세계의 것 같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이 세계에 도래하면 현실의 비참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이야 얼마든지 비루해져도 좋으니 그런 것, 한번쯤 보고도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비참해질 것을 각오하고 거듭 적겠습니다. 옮겨낸 소설들, 다 사랑 소설입니다.
7.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이따금씩 시선에 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데는 단어들이 있다. 그것이 지닌 깊이와 너비를 충분히 알면서도 어쩐지 지루하다거나 낯간지럽다 여기게 되는. 그럴 때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기척과 마음의 기색일 것이다. 이를테면 ‘진심’ 같은 말이 돌출되어 쓰일 때 모종의 불편함이 느껴졌다면 차라리, 혹독한 거짓의 말들로 점철되어 도통 진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즈음의 세계나 그 안에서 피로를 견디다 허름해진 저마다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때의 ‘진심’은 기꺼이 세계와 마음의 애틋한 거울이 되어준다. 어렵고 단단한 그 단어를 간절하게 붙든 소설에 진입하려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진심입니다』의 일이 그와 같다. 거칠게 줄이자면 이 소설은 아버지 이희락의 진심과 사투하며 그 삶을 진실되게 쓰려는 아들의 글, ‘이희락전(傳)’이다. 서사의 진행이나 인물 간 갈등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이 형성되는 일반적인 이야기와 다르게, 전 안에서는 이미 결정된 주인공(전의 대상)의 성격이 서사의 향방을 정해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이것은 ‘본격적 인간 탐구의 형식’이어서 전통적이지만 시공을 뛰어넘어 유효하다. 여기서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희락의 생애를 갈무리하기 위해 도입되었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아들인 작가에 의해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므로 일종의 메타소설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이희락의 진심은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아들과 길항하며 아들의 집필을 돕거나 또 방해한다. 아버지의 진심과 아들이 공동 필자인 셈이다. 거듭 적자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진심’이라 했다. 이 단어는 작중에서 넉살 좋은 존재로 의인화되어 소설 속 작가에게, 때론 소설 밖 독자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소설이 이채로웠다면, 혹 생경했다면 이 ‘진심’의 형상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의심하고 물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이희락이라는 존재의 진심이다. 그는 겉과 속 사이에 속수무책의 간극을 지녔지만 여간해서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 그런 채로 욕망 안에서 평생을 소모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꽤나 남발했고, 많은 이들을 아끼는 듯 보였으며, 그것이 그의 한때를 칭송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진 사랑은 실상 대부분 치장된 욕망이었다. 욕망도, 사랑도 쉬이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둘의 질감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가 있는데 다름 아닌 관계의 모습이다. 욕망 안에서 나와 당신은, 차라리 나와 내 것에 가깝다. 나는 당신을 본질 그대로 인정하려 들기보다 소유하고 싶어 한다. 욕망이 결핍에서 태어난 까닭이다. 나는 나의 부족을 채워주는 상대를 갈망하며 내가 바라는 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꺼이 소유물이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허나 어떤 결락을 충분히 메꿔줄 수 있는 존재란 없으니 욕망이란 얼마나 헛된가. 이희락의 삶은 이 욕망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 그는 비참한 방식으로 부모와 헤어졌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지상 과제 삼으며 외면과 내면을 달리 키웠다. 이 상실이 그를 지독한 욕망 쪽으로 밀어붙인다. 욕망의 반대급부에 놓인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를 훼손시키지 않음으로써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욕망은 계속 다른 욕망으로 대체된다. 이희락의 진심이 주장하는 사랑이 새, 물고기, 말에 대한 소유욕으로 자리를 바꿔 갈 뿐 끝내 정주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소설이 담아낸 것은, 분명 출구 없는 욕망에 유폐된 이희락의 고통스러운 생애사이다. 그러나 그저 그것을 갈무리하기 위해 작가가 공들여 지면을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희락의 욕망이 사실 우리가 지닌―혹은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한다. 섬뜩해 보이는 이희락의 생애가 사위의 존재들에게 무척 ‘보통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다. 작가의 진심은 이제 어디를 향해 형형한 눈빛을 보낼 것인가. 그의 다음 좌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약간은 편파적인 마음으로 큰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이다. 혹은 이렇게 믿기로 하자. 모든 가치가 낡아지고 흐려지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 진심을 감당하려는 소설의 진심이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8.
돌이켜보면 최진영이 오래 지켜 온 이야기들에는 사라지는 빛에 붙들린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당신의 서글픔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있었고, 닮은 마음의 무늬로 머뭇거리는 우리의 만남을 그려 내려는 다감한 시도가 있었다. 그 의지와 절박함과 다감한 시도를 빠짐없이 담기 위해 그의 소설들은 자주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날을 세워 ‘인간적’이라는 수사가 무색해진 시대를 겨누어야 했을 것이다. 공들여 빚어진 문장과 표현으로 소설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정서적 교감의 가능성을 두드렸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소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최진영 소설만의 어떤 사랑의 방식이라 해도 좋겠다.
9.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시집 곳곳에 충실하게 자리 잡은 서술어 “(들여다)본다”로부터 우리는 사위의 존재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절실한 마음을 간취할 수 있습니다. 그저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깃을 섬세하게 파고들어 존재의 내면을 투시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들여다보는’ 시인의 일일 것입니다. …(중략)… 내 생의 무게만큼이나 타자의 생을 육중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 별자리 위에서 별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장악하지도 해치지도 않고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이 같은 시집의 전언은 비단 당신과 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을 나눠가진 타자란 전 방위의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내면과 자연의 현상도 실은 서로의 반영물이어서 나는 자연과 내밀하게 겹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의 ‘안쓰러움’과 (일견 동명의 것으로 보이는) ‘안스리움’ 꽃이 싱싱하게 포개지는 것처럼(「안스리움」). _<해설> 중에서
10.
  • 양탄자배송
    5월 7일 (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독하고, 유려한 낙서인 것이다. 강제된 낙인이 아니라 자발적 문신(文身)이다. “올곧은 몸을 돌보거나 지키”는 이들은 할 수 없으므로 혹자에겐 질 낮은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뻔하지 않은 상처와 흉터”는 ‘나’의 증거인 까닭에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나아간다. 문신은 나의 확인을 위해 ‘나’의 표면에 고통을 새기는 일이다. 내 몸의 주인이 나임을 발견하는 뜻밖의 찰나이다. 이와 같은 훼손이라면 확신의 이음동의어일 것이다. 이로써 “거울은깨졌”고 “거울에 반사된” 나도 “거부”된다. “발바닥에 엉기는 피가 속살거리며 되묻곤 해/넌 아직도 죽지 못했니?”라 했던가.(이상「블랙커프스홀―Pour Malena」.) 이렇게 다시 들린다. ‘발바닥에 엉기는 피가 속살거리며 되묻곤 해/넌 여전히 이렇게 살아 있구나.’ 폭력의 세계를 유비하는 가위와 칼, 가시로 자해를 감행하는 까닭에 언뜻 ‘나’의 욕망이 또 다른 폭력으로 기울어 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명 칼을 부러뜨릴 수도 누군가를 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그것을 “훔쳐” “내 이름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상처 입은 자가 쉽게 함몰될 수 있는 파괴의 욕망을 위반한다. 낙서-문신은 그 위반의 기록이다. 이견 없는 필사의 필사다. 로맹 가리의 문장을, 이 시집을 위해 다시 적어야겠다. 우리에게는 완전히 몰수당하기 어려운 벽이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일은 내 몸에 낙서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비로소 이 벽-몸을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해 말할 차례다.
11.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 이 책의 전자책 : 8,400원 전자책 보기
“인간의 의미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공간, 여백이라 불러도 좋고 무어라 불러도 좋은,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그 공간에 있다.”(「배회」)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 타인에 대한 돌봄이 낡은 유물 같아진 시대에 보기 드문 유대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 세계의 것 같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이 세계에 도래하면 현실의 비참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이야 얼마든지 비루해져도 좋으니 그런 것, 한번쯤 보고도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비참해질 것을 각오하고 거듭 적겠습니다. 옮겨낸 소설들, 다 사랑 소설입니다.
12.
  •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날 때마다 새삼 놀란다. 그 새삼스러움은 타인의 아픔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비겁의 자취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기어이 보아야 하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구태여 들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문학은 그 책임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감당해주기 위해 쓰인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