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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김윤식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36년,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영 (사자자리)

사망:2018년

직업:문학평론가 교수

기타:서울대학교대학원 국문학 박사

최근작
2022년 12월 <김동인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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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로서의 자전과 일기

문학적 거울을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치자. 아니 네 가지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 이상도 있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천재 이상李箱의 거울, 자화상을 보여주는 거울, 집집마다 있으며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수은 칠한 거울. 거기엔 ‘나’의 얼굴이 좌우 뒤바뀌어 있다. 둘째는 윤동주의 「자화상」. 우물을 들여다보는 사내. 우울한 그 사내의 얼굴이 미워 돌아섰다가 다시 그 사내 얼굴이 보고 싶어 찾아가는 우물. 셋째는 윤동주의 「참회록」에서 보듯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는 그런 거울. 넷째, 미당의 「상가수의 소리」에서 보듯 오줌을 받아두는 마당 한구석의 거울. 상가수가 어느 날 자기 얼굴을 이 오줌통에 비추어보지 않겠소. 이른바 ‘소망’의 거울. 그러기에 상가수는 상여 앞에 서서 뙤약볕 같은 요령 소리를 내어, 삶을 저승으로 몰고 가지 않겠는가. 이런 ‘거울’이 이른바 ‘자전’의 형식들이다. 자전은 회고록과 다르다. 또 자성록과도 다르다. 이 자전의 한 가지 표본으로는 백철의 <자서전>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문학’ ‘자서전’이라고 되어 있다. 신의주고보를 수석으로 나와 도쿄고등사범에 합격한 백세철白世哲은 귀국 후 교사와 신문기자로, 또 해방 후에는 대학교수로 살았다. 김동리의 자전도 의미심장하다. 우익의 ‘두목’이었으며 청년문학가협회의 회장이자 한국문인협회의 회장이었기도 한 그는 자기 집안의 일을 어린 시절부터 소상히 기록했다. 아비는 술꾼, 큰형은 그 유명한 범보凡父(김정설), 중형은 장사꾼. 어째서 그가 우익의 두목이 되었는가는 ‘생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션스쿨 고보(서울 경신중학) 4년 중퇴였고 무학이었으나 그는 어느 신도 경배하지 않았다. 오직 ‘천지 자연’을 믿었던 까닭이다. 저 유명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이는 일종의 자전이라 할 수 있다. 첫줄은 누구나 놀라게 되어 있다. “복 되도다 그 시대가……(Selig sind die Zeiten.......).” 그 복된 시대란 “하늘의 별이 지도가 되어 그 빛이 우리의 갈 길을 훤히 비추어주는 시대”인 것. 그게 ‘서사시’의 세계. 그런데 어느덧 세계는 어둠으로 기울어져 별이 사라졌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자본주의)’이다.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그 길 찾기가 바로 ‘소설’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Die Theorie Des Romans>(1916)이다.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는 교토제국대학 경제학과 교수였다. 마르크스 이론 및 번역의 권위자였던 그의 <자서전>은 지식인의 깊고 복잡한 고뇌를 적은 옥중기록으로 수작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ßt>는 독일어로 쓰인 자전. 3ㆍ1운동을 전후한 무렵 한 양반집 외아들의 유년기가 서정적 문체로 형상화되어 있다. 독일에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다.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로 잘 알려진 영국의 극작가. 60세에 쓴 그의 자전 <The Summing Up>은 소설가인 그의 관심 영역이 빛나고 있다. 이른바 인생을 ‘요약컨대’로 압축한 것. 김윤식의 자전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여기서는 유년기까지 강변 포플러 숲에서 까마귀와 까치, 붕어를 벗하며 외롭게 자란 소년의 얘기를 담았다. 한편 일기란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곤충일기, 생활일기 그리고 여행일기, 옥중일기 등등. 이 모두는 또 다른 ‘거울들’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추는 거울들. 2016년 봄에 - 머리말

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이 책은 2006년을 전후해서 몇몇 학술단체의 초청을 받아 쓴 논물들을 중심으로 묶은 것이오. 갈 데 없는 문법과 어법이 뒤섞인 글쓰기라오. ('머리말' 중에서)

문학사의 새 영역

당연히도 이런 문제점들은 시대성의 도전 앞에 놓인 풍전등화 같은 것이기에 한층 소중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시대에 대해 제가 느끼는 어둠의 밀도가 깊을수록 가냘픈 등불이 갖는 의의가 소중해지는 법이므로.

비평가의 사계

대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글쓰기를 두고 세상은 논설이라 하오. 학술 논문도 성격상 이 범주에 들 것이오. 비유컨대 이런 행위란 마주 앉는 글쓰기라 하겠소. 현장비평도 범주상 같으나, 각도가 조금 다르오. 정면으로 마주 앉은 글쓰기에서 조금 비껴난 이른바 사선(斜線)의 글쓰기라 하겠소. 텍스트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과 균형을 이룬 글쓰기라고나 할까요. 어려운 것은 이 균형감각의 유지하기에서 오오. 나란히 앉은 글쓰기란 새삼 무엇인가. 자기를 대상으로 하여 자기를 지배하고자 하는 글쓰기라 할 수 없겠는가. 그것은 침팬지의 부자 관계와 흡사하오. 침팬지 부자는 마주 앉는 법이 선험적으로 없다 하오. 인간의 경우도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았을까. 마주 앉기, 사선으로 앉기를 거치면, 거꾸로 나란히 앉기의 지평이 열리는 것일까. 나란히 앉기의 매력이 있다면 혹시 이 동물적 생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소설.알렉산드리아

이병주에 있어 ‘소설 쓰기’란 노예사상 극복을 위한 한갓 방편일 뿐, 그 이하일 수도 그 이상일 수도 없다. 소설 따위란 안중에도 없는 것.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쓴 것이 「소설·알렉산드리아」다. 이병주는 말한다. “‘위신을 위한 투쟁’에서 최소한 그 위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소설 쓰기’이다”라고. 문제는 노예사상 극복이니까. 소설이란 그 방편이기에 ‘소설 자체’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그가 굳이 ‘알렉산드리아’ 앞에다 ‘소설’을 비석처럼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아! 우리 소설 우리 작가들

남들이 공들여 쓴 글이란 내게도 글 쓴 그 작가에 있어서도 실존적인 인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세계내존재'이다. 허무 속에 던져진 존재, 이른바 던져졌음(Geworfenheit)의 존재이며 따라서 혼자 있음과 불안과 무서움 속에 놓여 있다. 허허한 곳에 던져져 불안과 공포 속에서 혼자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존재, 그것이 내겐 남들이 애쓴 작품들이다. 이를 송두리째 받아들이기, 그것이 내게 또는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조건이 아니었겠는가. 이를 두고 의무라 부를 것이다. 이런 의무 수행이란 앙탈할 수도 없는 것. 왜냐면 의무 수행자만이 권리 하나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니까. 그 권리의 이름이 바로 자유(Freiheit)이다. 자기가 자기의 운명을 만들어가기(Entwufr)가 그것이다. 내게 있어 글쓰기가 정히 이에 해당된다.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

이제 가까스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나는 내가 갈 수 있고, 가야만 할 길, 그리고 가버린 길목에 서 있다. 군에게 이 길목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난데없는 충동이 이 책을 만들게끔 나를 이끌어갔다. 회색의 세계에 빠져 지내던 어느 세월, 문득 정신을 수습해보니 나는 한 마리 두더지가 되어 있지 않았겠는가. 눈먼 땅두더지 말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두더지는 저가 눈멀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이유인즉 단순명쾌한 데 있지 않았겠는가. 망막엔 저 초록색 생명의 황금나무가 선연했기 때문이다. 그런 환각에 빠져 있었던 까닭이다. 아득한 회색이었다. 선연한 초록이었다. 이 둘이 동시에 있었다. 회색이 내게 현실이라면 이를 둘러싼 무지갯빛 환각이 초록이었다.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가리게 되기' 따위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소설과의 대화

...이 시원의 부름이란, 당초에 원리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소설과 우리 소설에서 새로이 만들어진다는 사실. 전대의 소설과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새로이 창출된다는 사실. 시원의 부름에 귀기울이기란, 그러기에 소설의 본질 형성에 동참하기라는 사실. 소설읽기를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에 동참함이라는 사실. 작가는 씀으로써, 독자는 읽음을 통해 함께 궁극적으로는 이 물음 속에 수렴된다는 사실. 제가 소설 읽는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작가론의 새 영역

여기 수록된 작가론들은 2004년에서 2005년 사이에 씌어진 것들입니다. 일찍이 필자에 의해 한두 번 논의된 것들이기도 합니다. '작가론의 새 영역'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지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문학사와의 거리 재기이기에 어찌 늘 새로 쓰지 않을 수 있으랴. 말을 바꾸면 이 작가론들은 제 자신의 실존적 내면풍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부정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

우리 근대 문학에서 염상섭, 이양하, 정지용, 윤동주 등의 예술이 높은 완성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누구에 의해서도 능가당하지 않을 존재이기에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다. 이 경이로움 속에는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 다음날 항구의 개인 날세여!"(정지용, 「해협」)의 감각이 숨쉬고 있지 않았을까.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

내가 소설을 읽는 까닭 20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면서 나는 소설 읽기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기울여 왔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그러한 처지에 있다. 대체 소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나를 매료시켰던 것일까? 지금도 나는 이 물음에 잘 대답할 수 없다.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것은 소설이야, 라든가, 소설 쓰고 있네, 라고. 현실과 소설이 별개라는 것, 현실의 인간과 소설 속의 인간이 다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고. 과연 그러할까. 인간을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말해진 인간이란 무엇인가. 언어로 짜여진 직조물 곧 텍스트가 아닐 것인가. 허구로 변한 인간이 아닐 것인가. 현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현실도 언어로 직조된 텍스트로서의 현실이다. 인간도 현실도 언어에 의해 묘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의 자기 고백에다 분석의 기틀을 놓은 프로이트도, 작가는 죽었다고 떠는 구조주의자들도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지 않았던가. 현실을 나는 알고 싶었다. 인간을 나는 알고 싶었다. 세계를 나는 알고 싶었다. 언어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앞에 소설이 있었다. 어째서 하필 소설이어야 했던가에 대해서는 이 책의 앞 단계인 <김윤식의 소설 현장비평>의 머리말에 밝힌 바 있어 중복을 피하거니와, 여기서는 다음 한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아무리 소설을 열심히 읽어도 나는 현실을 잘 알 수 없었다. 인간을 잘 알 수 없었다. 세계를 잘 알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음의 밀도만이 더 높아질 뿐이었다. 그래도, 그러기에 나는 소설을 계속 읽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언어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앞에 소설이 있었고, 있고, 있을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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