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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이름:김언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3년, 대한민국 부산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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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오래된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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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1.
강우근의 시에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 영혼이 깃든 사물로 화(化)한다. 만물에 영혼이 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을 몸소 실천하는 듯한 그의 시는 세련된 도회적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서 주변 사물에 깃든 영혼을 세심하게 발견하고 형상화한다. 과학 만능의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저와 같은 작업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식물처럼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는 시에서 한가지 단서가 보인다. 사물이 식물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잎을 펼치는 식물의 방식을//최선을 다해 이해하고”(「점선으로 만들어지는 원」)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과업이자 작업이지 않을까. 이런 짐작으로 시를 다시 보면, 이상하게 화자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화자를 보는 장면이 자주 도드라진다. 온갖 사물에 깃든 영혼이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말을 걸어오고,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은 강우근 시의 주된 화법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해 대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의 시선은 결코 공격적일 수가 없다. 누구보다 순하고 선한 마음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그의 시에 와서는 일상처럼 벌어진다. 거기서는 주체와 대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자리를 사이좋게 바꿔가며 한데 어울린다. 갈등이나 분열과는 거리가 먼 화자의 시에서 새삼 일깨워지는 감정도 그래서 맑음이고 환함이다. 그 맑음과 환함을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 또 그의 시를 읽게 할 것이다.
2.
노은희 작가의 전작들이 죽음과 사랑을 화두로 삼았다면, 이번 소설은 단연 ‘기도’를 가운데 모시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다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가운데 모시고서 탄생하는 기도다.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절실한 기도와 기도로 연결된 서사가 축을 이루는 가운데, 전작들에서 천착해온 죽음과 사랑이 어떤 소설적인 전회를 이루는지 살피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인간의 삶에 끝까지 따라붙는 사랑과 죽음의 문제가 상대적이면서 유한한 그릇을 넘어 절대적이면서 무한한 존재의 품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인간들 저마다의 목소리로 발현된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들’ 하나하나가 모이고 엮인 자리에서 탄생한 소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도문을 이루면서 결말을 향해 간다. 어떤 결말이 예정돼 있든 거기에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투신하듯이 사역하는 바도 그 어디쯤 있을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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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박영기의 시는 계속 미끄러지는 중이다. 말하는 대상이 ‘오리’면 ‘오리’에 대해서, ‘무환자나무’면 ‘무환자나무’에 대해서 계속 미끄러지며 말을 이어 간다. 심지어 실명인 ‘공효진’조차 ‘공효진’이라는 기표를 따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종내에는 ‘공효진’도 아니고 ‘무환자나무’도 아니고 ‘오리’도 아닌 무엇이 남아 여백을 채우는 시. 혹은 “그 무엇도 아닌 것”이 그 무엇도 아닌 채로 “그 무엇이 되어 가는”(「바람행성」) 시라고 해도 상관없는 이 이상한 기표의 흐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뭐라고 부르든 기표가 승한 시에서 흔히 보이는 언어유희가 이상하게 박영기의 시에서는 유희로만 읽히지 않는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와중에도 날카롭게 찔러 오는 이미지가 되풀이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치 “삼 년 동안 같은 꿈을 왜 밤마다 다르게 꾸는지/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녹」)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시의 화자는 그래서 꿈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현실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춤의 주인공처럼 스텝을 밟는다. 어찌 보면 “땅에 닿으려는 발버둥” 같고 또 어찌 보면 “닿지 않으려는 안간힘”(「눈」) 같은 보법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맨 끝에 붙어 가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다(「개미 행렬」). 앞장서는 걸음은 어정쩡하고 마지못해 뒤따르는 ‘나’는 맨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돌이켜보면 삶의 어느 대목에선가 그런 표정을 한 번쯤 본 것도 같다. 거울처럼 본 것도 같다. 그게 내 얼굴이면서 당신 얼굴이기도 할 때의 표정을 찰나처럼 잠깐 보여 준 것도 같다. 그게 반가워서 손을 들면 곧장 떠나고 없는 곳에 시의 말이 남는다. 박영기 시의 언어가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는 기표에 그렇게도 매달렸던 이유 역시 “한 번의 춤 한 번의 노래//한 번의 무대”로(「잎이 지는 속도」) 사라져 가는 삶의 매 순간에 박혀 있을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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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배종영의 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게 한다. 성장한 나무는 혼자만의 성장을 얘기하지 않는다. 지금껏 성장의 밑거름이자 깨우침의 스승이 된 것들을 잊지 않고 다시 불러낸다. 다시 불러낸 그것들의 얘기가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서 세상을 이루고 우주를 이루고 또 누군가의 시를 이루어갈 것이다. 든든하고 품이 넓은 나무의 말이라 불러도 좋을 그 시가 어쩌면 배종영 시인의 시일 것이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의 말을 듣듯이 시집을 펼치고 또 덮는다. 펼치고 덮는 그 사이가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그늘처럼 아득하고 깊다. 거기선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올 것 같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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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뜬금없이 성당에 다닌다고 하면, 슬픔부터 느끼는 사람이 있다. 지옥 같은 마음 다 내려놓고서 성당에 나간다는 것일까, 이런 헤아림으로 속 깊이 슬퍼하는 사람. “사람이 그리워서라는 말처럼 그 말에 눈물”부터 핑 도는 사람이 서화성 시의 화자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듯이 나직이 말을 이어 가는 곳에 서화성의 시가 있다. 슬픔이 모종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면, 이번 시집에서 엿보이는 슬픔은 그러한 슬픔마저 희미해지는 지경에서 올라오는 슬픔이라서 남다르다. ‘선험적인 슬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되는 곳에서 서화성 시의 슬픔은 계속 진화 중이다. 다만 슬픔으로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는 우리의 삶을 되비추는 일에 열심인 시를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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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문득 엊그제 일을 떠올리듯 서광일 시인의 시를 읽는다. 엊그제 일이라면 아주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좀 전에 지나친 일도 아니다. 지금 지나치는 일 대부분이 엊그제 일이 되면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일이 되고 마는데, 또 어떤 일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엊그제 겪은 일처럼 선명히 남아서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니 엊그제가 주는 시간감은 묘하게 이중적이다. 방금 겪은 일을 기억도 흐릿할 만큼 멀리 보내 버리는가 하면, 아주 오래전의 일을 불과 며칠 전의 일처럼 소환하는 힘이 엊그제라는 말에 녹아 있다. 가까운 것을 먼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것을 가까운 것처럼 여기게 하는 힘은, 옛일이나 방금 전의 일이나 “엊그제 같은/슬픔”과 “아픔”의 정서로 담아내는 서광일 시의 화자에게서도 공히 발견된다(「엊그제」). 당장의 일은 며칠이 지난 일처럼 느껴지고 철 지난 일은 며칠밖에 안 지난 일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원근감이 시에서 묻어난다고 해도 좋겠다. 당연히 그의 시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격정이나 건조함과는 거리가 멀다. 덤덤함. 그래 덤덤함이라는 말로 되받을 수 있는 그 목소리가 거느리는 시의 음역대는 의외로 넓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장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타인의 목소리까지 덤덤히 껴안고서 다시 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마치 엊그제 들었던 목소리처럼 생생함과 어렴풋함이 공존하는 시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평탄화된 상처나 고통이 아니다. 감정의 바닥과 꼭대기, 아니 삶의 바닥과 꼭대기를 모두 지나오면서 체득한 말이 어찌 평탄하게만 들리겠는가. 아픈데 아무렇지 않게 아프다는 것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시를 “엊그제 같은/그 사람”이 들려주는 목소리로 내내 느껴야 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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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전호석 시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아무 사람”처럼 나온다. “아무 사람”은 말 그대로 아무나 될 수 있는 사람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도 들어가는데, 때로는 시의 화자조차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이 세계를 돌아다닌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화자에게 발화자로서의 권위가 충분할 리 없다. 미약한 권위의 발화자에게 이 세계는 사실상 구경꾼으로서의 지위밖에 허락하지 않는다(“사실/구경이 취미입니다 제 일이 아닌/ 파국들”). 혹은 관망자나 방관자의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이 아무래도 대충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데 이상하게 아프게 들린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이의 고백이 나 한 사람이나 너 한 사람의 고백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삼 “아무 사람”의 고백으로 들리는 그 말이 거창할 리도 유창할 리도 없지만, 그럼에도 “내리는 형태로 찍힌 눈송이들”처럼 정돈되지 않은 그 말이 이상하게 반갑다. “사는 일은 어렵”고 “지폐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많고 많은 달변가의 말보다 “쌓인 무가지”처럼 무용하게 “펄럭”이는 말이 귀에 와서 콕콕 박히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 말은 ‘아무 사람의 말’이면서 바로 ‘나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전호석의 시가 독자에게 기대하는 말도 어쩌면 그와 같은 말일 것이다.
8.
날카롭게 돌출되는 흉기를 먼저 보여 주는 방식으로 말을 시작하는 시. 그것이 신성희 시의 일단을 이룬다. 찌르거나 베거나 때리거나 물어뜯거나 태워 버리는 용도가 전제된 사물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비중을 차지하는 사물이 있으니, 바로 ‘뿔’이다. “감출 수 없는 마음”과 “벗어 놓았던 내 피부들”과 “갇혔던 소리들”과 “터져 나오는 울음”이 응어리진 채 솟아오르는 뿔. 여러 색깔의 응어리가 결과적으로 검은색을 향해 간다면 여러 감정의 응어리는 끝내 검고 딱딱한 뿔로 융기한다. 융기하면서 “어디로도 나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 흉기와 무기로 점철된 폭력의 현장이 나의 피부에 새겨지면서, 그러한 폭력의 시간이 피부 깊숙이 누적되면서, 역으로 솟아오른 결과물이 어쩌면 뿔이 아닐까. 뿔이 폭력의 기억을 “땔감”으로 삼아 솟아오르는 불과 같은 것이라면, 불타는 현장을 통과해 온 자의 육성은 곧 불의 언어이자 신성희 시의 언어인 것이다.
9.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어떤 시적 수사도 비유도 끝내는 봉착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지경을 허무와 맞먹는 다른 경지의 언어로 밀고 나가는 자리에 시인이 있다면, 그에 충분히 부응하는 시인으로서 김중일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현대시작품상 수상으로 거듭 증명이 되었기를 바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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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송진은 말과 말 사이를 보는 시인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사이를 다시 말로 채워서 신나게 말잔치를 벌여 놓는 시인. 그 말의 대잔치에서는 석류와 석유도, 친절과 전철도, 토마토와 톱도 원래는 아주 가까웠던 사이인 것처럼 사이좋게 만나서 논다.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한바탕 질펀해진 말잔치를 구경한 입장에서는 영영 그 사이를 잊지 못하고 석류와 석유를, 친절과 전철을, 토마토와 톱을 한데 묶어서 떠올릴 것이다. 뿐인가. 의미상으로도 발음상으로도 전혀 상관이 없는 꽃과 질병 사이에도 송진 특유의 ‘사이’가 개입하면 흥건한 사유의 잔치로 돌변한다. 뿐인가. 벼와 벼 사이에도, 개구리와 개구리 사이에도. 언어와 사물의 간극만큼이나 먼 ‘사이’가 있다는 것을 새삼 증명하는 방식으로 송진의 시는 힘을 발휘한다. 아득히 먼 사이를 가깝게 하고, 한 몸처럼 가까운 사이를 다시 멀게 만드는 힘. 그 힘에 기대어 눈물에서 별을 느끼고, 땀에서는 태양을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송진의 시에서는 ‘실화’처럼 벌어진다. 우리들 언어의 허상 같은 순간을 벼락처럼 깨쳐 주는 마력이 송진의 시에는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온갖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말의 흥겨운 잔치를, 놀라운 발견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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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임후 시의 화자는 지난 십 년간 우리 시단을 첨예하게 이끌었던 선한 의지의 화자들과는 여러모로 성격을 달리한다. 좋은 것 내지 좋은 곳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거나 장착하고자 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지난 십 년간의 시단 풍경을 압축한다면, 임후의 시는 그러한 압축 파일에 묶일 수 없는 자의 내면 풍경으로 조각된다. 조각은 둥글둥글하지 않다. 그것은 선하고자 하는 의지의 이면에서 짝패처럼 따라붙는 맹목이나 위선을 불편하게 긁어 댄다. 맹목이 될 바에야 무심(無心)을 택하고 위선이 될 바에야 비선(非善)을 택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속물성을 들추어내는 것이 임후 시의 일면을 이룬다면, 속물성의 끝 간 데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삶의 공허함은 그의 시의 바닥을 이룬다. 그의 시는 깨달음의 언어가 아니라 불가지의 언어로써 세계의 맨바닥과 부딪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끝내 알 수 없음의 세계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허용하는 듯하다. 무엇을 붙잡고 늘어지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한 인간의 죽음이자 한 세계의 종말과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포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의 시는 흘러나온다. 일상을 비집고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덤덤하면서도 시니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직설적이고, 달콤하면서도 차가운 어조와 어울리는 이유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 내장된 어떤 자화상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풍요 가운데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 자화상은 한 사람의 자화상에 그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믿음과 불안감”으로(「가위바위보」) 가득 차 있는 동시에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으로 텅 비어 있”는(「전부는 없다」) 얼굴이 어디 한 사람의 얼굴뿐일까. ―김언(시인)
12.
최지은은 “듣고 싶은 말이 들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시인이다. 시가 되기를 기다릴 줄 안다는 말과도 통하는 저 기다림의 미덕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부터 쏟아내는 시나 듣고 싶은 말부터 들려주는 시와는 태생부터 다른 시를 예감케 한다. 최지은에게 시는 한 박자 늦게 탄생하는 무엇이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소식처럼 천천히 들려오는 그 무엇의 소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내면을 한바퀴 더 돌고 나온 자의 목소리일 것이다. 한바퀴 더 도는 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더듬더듬 만져지는 것들. 건져지는 것들. 이 모든 것이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누군가의 그리운 손길로 다가올 때, 시는 끝내 닿을 수 없는 도착지를 거느린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저 모든 것이 한번도 뿌리치지 못한 누군가의 애처로운 눈길로 느껴지면, 시는 어찌해도 달아날 수 없는 상처에 붙들린 꿈이 된다. 꿈이든 이야기든 혹은 꿈의 이야기든 상관없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맴도는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말. 스며나오는 말. 조금씩 조금씩 백지를 적시듯이 번져오는 그 말이 쌓이고 모여 물방울 하나의 형상으로, 물방울 하나의 목소리로, 물방울 하나의 운명으로 응결된 자리에 다시 최지은의 시가 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떨어져서도 다시 떨어지기 위해 제자리로 집결하는 물방울의 말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모여든 곳에 이 시집이 있을 것이다. 떠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자리에서 기억하듯이 꿈을 꾸고 꿈을 꾸듯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들려주는 이 시집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내밀한 고백을 넘어 누구나 품고 있을 저마다의 상처가 바로 그 자신의 뿌리를 이룬다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워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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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물 한 방울의 의지 민구 시인의 시는 충만함을 지향하지 않는다. 무언가로 꽉 차 있음을 욕심내지도 않는다. 마치 “일 분이 되기 전 영원한 오십구 초”처럼 완결이나 완성과는 거리를 둔 듯한 그의 시에서 화려한 수사나 예술가연하는 자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평범한 일상의 장면과 소소한 내면의 언어가 시를 채우는데, 그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이 민구 시의 묘미라면 묘미겠다. 무미하되 건조하지 않고, 담담하되 답답하지 않고, 순순하되 심심하지 않은 그의 시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 한 방울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하나씩 풀어보자면, 물 한 방울처럼 아무 맛이 없으면서도 무슨 맛이 계속 나는 듯한 잔상을 남기는 화법. 물 한 방울처럼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으면서도 해변이든 숲이든 하늘이든 무엇이든 다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세계. 뻔하디뻔한 일상 가운데서도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물방울 하나”를 발견하는 상상. 그런 환상조차 다시 물 한 방울처럼 아껴서 소비하는 검소한 언어가 민구 시의 일단이라면, 그 극단에는 시를 향한 아니 이 세계를 향한 물 한 방울의 의지 같은 것이 보이지 않게 들어 있다.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시각각 증발하는 것이 물 한 방울의 운명이겠지만, 그 운명에 표나게 대들기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비폭력의 힘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 한 방울이 마를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는 자세는 물 한 방울이 마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이다. 시집의 핵심 구절이기도 한 “그는 거기에 있겠다고 했다”는 발언이 미력하지만 끈질기게 이 세계를 응시하는 자의 조용한 다짐이라는 점도 함께 짚어둔다.
14.
송기영의 이번 시집은 온갖 ‘비자기(非自己)들의 기록으로 빼곡하다. 비자기는 물론 자기가 아닌 자기다. 자기가 아니므로 비자기가 헌신하는 곳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한다. 다른 곳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계다. (.......) 그렇다면 자기는 어디에 있을까? 과연 자기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끝없는 비자기들의 향연 속에서 실종되고 없는 자기에 대한 질문으로 이 시집은 다시 빼곡하다. 그것은 “물에 지문을 남”기는 것처럼 허망한 질문이지만, 물에 지문이라도 남기려고 애쓰는 자의 고투가 송기영에게는 또한 시일 것이다. 온갖 ‘비자기’에 바치는 헌사이면서 ‘자기’에 대한 질문을 놓치 않는 한 편의 자화상이 또한 이 시집일 것이다.
15.
이 시집의 결정적인 매력은 이상한 균형감에서 나온다. 정직하되 거칠지 않고, 섬세하되 나약하지 않은 정서에서 올라오는 언어는 어두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밝으면서도 슬픔을 놓지 않는 이상한 풍경 앞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16.
세상을 향해 내미는 나의 손길이 어디에도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실물감 너머에서 발생하는 저 유령의 순간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는 이가 또 있을 것이다. 나도 저런 유령 하나쯤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도 모르게 저 유령의 삶을 껴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어쩌면 저 유령의 순간을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더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고백들을 기억하듯이 기억하듯이 미리 써내려 간 유령 일기다. 그 흔한 비명이나 울음 한 점 없이도 아프게 아프게 들려오는 밤의 일기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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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류성훈의 시를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선 아득한 우주 공간을 홀로 여행하는 자의 심정이 되어 보아야 한다. 우주라는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고독함을 한 번쯤 느껴 보고 싶은 사람 역시 류성훈 시의 반가운 독자가 될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길에 새삼 종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 봐야 영원히 유예되는 위치에서 상상되는 역, 몽상되는 역. 어쩌면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영원히 “종점이 없는 역”(?글로뷸?)일 것이므로, 홀로 여행하는 자의 우주적인 고독은, 아무리 뻗어도 뿌릴내릴 수 없는 두 발과 아무리 늘여도 가닿을 수 없는 시선으로 헤매는 심경일 수밖에 없다. 안착해야 하는 여기와 도착하고픈 저기가 모두 막막해진 상태에서 그보다 더 먹먹하게 읊조리듯 밀고 나가는 시, 항진하는 시, 그것이 류성훈의 시라면, 거기서 발견되는 풍경은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총상화서?)처럼 해갈되지 않는 내면을 앞에 둔 풍경과 같다. 어디를 향하더라도 방랑과 방황이 예정된 그 길에서 미아와 고아와 탕아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날 때부터 고독을 타고난 이 화자들이 때로는 ‘보이저 1호’의 막막한 심경으로, 때로는 우주 소년과도 같은 무구한 마음으로 나직이 읊고 가는 말. 그것이 다시 류성훈 시의 언어라면, 그 언어가 내는 길은 앞으로도 내내 종점을 모르는 길일 것이다. 아니면 “다시 만나러 가는 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이 같은 종점”(?글로뷸?)을 두고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어떤 길이든 그 길의 끝에서 한 사람의 기원과 한마디 말의 기원과 한 줌도 안 되는 이 우주의 기원을 쫓아서 멀리멀리 항해해 가는 한 여행자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을 것이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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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은 최근 십년 사이에 등장한 시인들 가운데 가장 ‘이빨’이 센 시인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입담이 좋다고 하기엔 부족해 보이는 이 시인의 ‘구라’ 치는 실력은 근래 등장한 몇 안 되는 입담 좋은 시인들 사이에서도 압권이다. 눈앞에 당도한 구라 하나의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다른 구라들이 줄줄이 달려와서 문장을 기절시켜버리는 방식은 쉬지 않고 시를 끌고 가는 동력이면서 멈추지 않고 시를 읽게 하는 매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시가 대세인 이즈음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이 정도로 활달하고 역동적인 언어의 잔치를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한달음에 읽히는 류진의 시는 그래서, 그래서라도 그 특유의 속도감을 지우고 찬찬히 음미해봐야 한다. 음미해보면 보이는 것. 견고하고 치밀하게 세워놓은 이 세계의 현실 논리가 어쩌면 말짱 거짓부렁일 수도 있다는 사실. 기껏해야 허방을 허방으로 막고 허구를 허구로 덮으면서 쌓아 올린 모래성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일깨우는 데 많은 진실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1퍼센트의 진실과 99퍼센트의 구라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온갖 허구 가운데서 태어나는 류진의 시가 새삼 증명한다. 모래성처럼 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모래성처럼 다시 쌓아 올린 언어의 성채를 그렇다고 허망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99퍼센트의 허구를 지탱하는 1퍼센트의 진실은, 극소량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듣는 이를 아프게 전염시킨다. 슬프게 감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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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진은 최근 십년 사이에 등장한 시인들 가운데 가장 ‘이빨’이 센 시인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입담이 좋다고 하기엔 부족해 보이는 이 시인의 ‘구라’ 치는 실력은 근래 등장한 몇 안 되는 입담 좋은 시인들 사이에서도 압권이다. 눈앞에 당도한 구라 하나의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다른 구라들이 줄줄이 달려와서 문장을 기절시켜버리는 방식은 쉬지 않고 시를 끌고 가는 동력이면서 멈추지 않고 시를 읽게 하는 매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시가 대세인 이즈음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이 정도로 활달하고 역동적인 언어의 잔치를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한달음에 읽히는 류진의 시는 그래서, 그래서라도 그 특유의 속도감을 지우고 찬찬히 음미해봐야 한다. 음미해보면 보이는 것. 견고하고 치밀하게 세워놓은 이 세계의 현실 논리가 어쩌면 말짱 거짓부렁일 수도 있다는 사실. 기껏해야 허방을 허방으로 막고 허구를 허구로 덮으면서 쌓아 올린 모래성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일깨우는 데 많은 진실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1퍼센트의 진실과 99퍼센트의 구라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온갖 허구 가운데서 태어나는 류진의 시가 새삼 증명한다. 모래성처럼 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모래성처럼 다시 쌓아 올린 언어의 성채를 그렇다고 허망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99퍼센트의 허구를 지탱하는 1퍼센트의 진실은, 극소량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듣는 이를 아프게 전염시킨다. 슬프게 감염시킨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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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서소문로 89-31)
버려진 눈이 기적을 행하는 것처럼 김소형의 시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 같다. 귓가에서 조곤조곤 들려주는 소리가 아니라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조금 과장하자면 “가장 먼 은하의 개미”가 내는 소리처럼 희미하고 희박하게 들린다. 소리는 소린데, 너무 작아서 귀로 듣기보다 눈으로 담아야 하는 소리. 눈을 크게 뜨고 상상해야 겨우 감지되는 소리. 가령 “소리 내며 따라오는 눈송이”, “벌레의 울음소리로 엮은 양탄자”, “심해까지 울리던 종소리” 같은 기묘한 음풍경(音風景)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때로는 “먼 조상의 이름처럼” 때로는 “까마득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소리의 풍경은 그러나 현실과 무관한 세계에 대한 탐닉의 결과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매우 멀리 있는 듯 낯설게” 보이는 한편으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의 소리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소리이기도 하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있는 줄도 모르는 그 소리가 가장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더 멀어 보일 때, 더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그 소리를 이상하게 증폭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김소형의 시는 발화한다. 무심히 버려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하는 “창문과 빛”을 기어이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의 시는 또 발생한다. 기어이 발생하는 시는 기어이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심히 쌓여서 버려진 눈이 “가끔은 지붕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행하는 것처럼, 시인 혼자서 내내 듣던 소리가 어느 순간 우리 모두의 귀를 놀라게 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21.
슬픔을 근거지로 모이고 흩어지는 시편들 슬픔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향한 감정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떤 것들을 향한 마음인데, 엉뚱하게도 슬픔을 터전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시인들이 있다. 미래를 지향한다고 선언하는 시인 셋이 있다. ‘뿔’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고 다져진 동인들. 최지인, 양안다, 최백규. 이 세 시인의 면면은 제각기 다르고 그들이 지향하는 시의 세계도 겹쳐지는 것만큼이나 다른 지점이 많이 보이는데, 유독 ‘뿔’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한 목소리로 미래를 말한다. 세 시인 모두 슬픔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의 당사자들인데, 왜 이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 미래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들의 시에서 미래는 장밋빛 전망을 담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전망 같은 것은 사치품처럼 느껴지는 곳. 전망이 안 보이니 건설적인 계획도 환영처럼 존재하는 곳에 ‘뿔’의 시가 있다. 희망도 기대도 발붙이기 힘든 곳에서 미래를 말하는 시. 그것이 뿔의 시라면 거기에 담긴 미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미래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생겨날 수 없는 미래는 눈앞에서 환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리 없이 통하고 또 섞인다. 창작동인 뿔을 구성하는 세 시인의 세계도 바로 이 지점에서 통하고 섞인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는 기원이 있고 생겨날 수 없는 미래에는 끝내 소멸이 있다. 말하자면 기원과 소멸이 맞물리는 곳에서 뿔의 시는 탄생한다. 저마다 들려주는 목소리가 다를 뿐 과거와 미래, 기원과 소멸이 맞물리는 곳에서 이들의 시는 다시 하나의 정서로 통한다. 바로 슬픔이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처럼 슬픔을 근거지로 모이고 흩어지는 시편들이 하나처럼 또 여럿처럼 빛나고 있는 시집. “찰나의 밝은 것들”로 빛나는 시는, 그것이 찰나라서 또 슬픈 것이리라.
22.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8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김경수 시인의 시에서 소멸과 탄생은 한 몸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탄생의 순간과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소멸의 운명은 상식적으로 한자리에 섞일 수 없는 몸을 이루지만, 그의 시에서는 한 몸처럼 기거하고 한 몸처럼 움직인다. 매일같이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이 공간이 그의 시에서는 매번 탄생과 소멸이 겹쳐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실의 논리 앞에서 종종 잊히는 신세가 되고 마는 탄생과 소멸의 순간을 기어이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태어났고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자가 새삼 글자들을 매만지고 문장들을 어루만지면서 쉼 없이 스쳐 가는 삶의 순간순간을 다시 보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이 늙어가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마치 처음 생명을 받았을 때의 경이로운 순간처럼 세상을 다시 보고 다시 말하고 다시 노래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한 시인의 근원을 이룬다. 이번 시집은 그의 여섯 번째 변하지 않는 몸이다.
23.
  •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만남도, 이별도, 희망도 모조리 씨가 말라버린 세대의 노래. 오직 한 사람의 노래이자 절규. 그것이 보르헤르트의 문학이다.
24.
  •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하에서 지하로 흐르는 물처럼, 언뜻 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들여다볼수록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문장.
25.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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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언주의 시는 시적인 소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 그것이 시라면, 시에서의 소통은 마치 애인과 밀어를 나누는 것처럼 은밀하고 깊을 수밖에 없다. “당신의 혀와 내 혀를 잇”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심언주의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지점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도, 그래서 혀다. 사실상 혀와 혀의 만남이랄 수 있는 소통의 현장이자 상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귀로 듣기 이전에 혀로 먼저 반응하는 이상한 체험을 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것을 귀가 아니라 혀로 먼저 듣는다. 혀로 들으면서 혀로 들려주는 이상한 가역반응이 곧 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언어. 그 언어를 듣기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혀를 놀려야 하는 곳에 또 한 권의 인상적인 시집이 막 도착했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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