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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역사

이름:김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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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청년, 안중근을 말하다>

단재 신채호, 중국에 역사를 묻다

아름다운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유린되는 것을 목도한 지식인 신채호, 지행합일의 독립운동가인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31살의 젊은 청년 신채호는 『동사강목』을 손에 쥐고 푸른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는 57세가 되어 부인과 아들에 의해 한줌의 유골이 되어 다시 압록강을 넘어 조국으로 돌아 왔다. 26년간의 시간이다. 사(四)반세기이다. 아내를 15년 만에 만나 품에 안기어 한 줌의 재로 돌아 왔다. 이 책은 그 기록을 찾아 가는 이야기이다. 신채호 중국 발자취를 찾아 대략 2,280km를 다녔다. 서울-부산 5배가 넘는 거리이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두 한국인이 기록하였다. 처음 뤼순에서 안중근 의사를 통하여 만났다. 안중근 의사 연구와 신채호 연구, 현장을 사랑하고 현장이 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현장을 통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 책은 그 기록의 결정체이다. 근대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발로 뛰는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한국인만의 언어로 기록하였다. 신채호의 중국 26년간은 거주 지역별로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독립운동가(칭다오, 상하이), 언론인(상하이), 역사학자(베이징, 뤼순), 교육자(환런, 지안, 상하이)이다. 그러나 모두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이자 바이블인 「조선혁명선언」에 귀결된다. 강한 나라, 힘을 길러야 함을 붓을 든 지식인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당신 스스로 당당히 지행합일로 보여 주셨다. 행동하는 참 지식인, 진정한 독립운동가이다. 행동하는 참 지식인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명언 제조기 신채호이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아아, 역사가의 책임이 그 또한 무거운 것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더니,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 먹으려한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와의 투쟁’,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하라.’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어야 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 등 많아도 너무 많다. 신채호가 『동사강목』을 들고 압록강을 건넜듯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이제는 『단재 신채호, 중국에 역사를 묻다』를 들고 건너기를 바란다. 신채호 선생이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의 날을 맞은 지 76년 되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역사학자 신채호가 염원하던 광복된 조국이 지금의 분단된 국가의 모습이었을까?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도움을 주신 분은 홍성림 선생이다. 홍성림 선생은 베이징에서 재중항일역사기념사업회 이사로있다. 졸고의 첫 독자로서 날카로운 질정과 좋은 조언을 주신 분이다. 또한, 필자가 중국에 거주하는 동안 부모님과 가족의 배려와 도움이 없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신채호 선생님의 영전에 올린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신채호 선생님의 영혼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 때가 적지 않았다. 신채호 선생님은 우리보다 중국에서 더 많은 삶을 가난과 질병 속에 사셨다. 그래서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과도한 서술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독자 여러분들이 너그럽게 보시고, 가감하면서 읽어 주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 김월배, 주우진 쓰다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이 책은 내가 중국에서 10년 동안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관하여 연구하고 추적한 현장의 세세한 기록이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안중근의사의 유언을 광복 70주년이 된 오늘까지 실현시켜드리지 못한 죄송스러움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이다. 내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 찾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제의 부당했던 안중근 의사 재판으로 안 의사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우리 국민들에게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 사업과,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독립정신과 동양평화사상의 선양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고자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현재까지 내가 확보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대한 모든 자료와, 중국 내에서 진행되었던 발굴 사업의 성과와, 앞으로 있을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에 참고가 될 만한 모든 정보를 이 책에 총정리하였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참 평화의 길이다

안중근 의사 유해는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 유해는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내 명함의 상단에 있는 문구이다. 나는 명함을 줄 때마다 이 문구를 주문처럼 강조한다. 중국인에게 건네는 명함도 예외가 아니다. <一定尋?安重根義士遺骸> 내 명함을 받는 중국인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나는 그때마다 동양평화를 위해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중국 뤼순에 묻혀있고 지금껏 찾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혹자는 안중근 의사를 가슴에 묻자고도 한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1879-1910) 순국 111년이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속에서는 의사님의 마지막 유언이 나를 깨운다. 돌아가시면서 광복이 되면 조국에 묻어달라 하신 그 유언을 어찌 잊을 수가 있으며 어찌 가슴에만 묻어둔단 말인가. 나는 반드시 의사님의 유해를 찾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중국 땅에서 15년간 살았다. 오로지 안중근 의사님의 후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 유해는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나의 명함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드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안중근 의사 유해는 반드시 대한민국 국민이 찾아야 한다. 나는 돈키호테처럼 앞장서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김월배 씀

안중근, 하얼빈에 역사를 묻다

하얼빈에는 수많은 역사가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가 곳곳에 즐비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 동포들의 역사, 하얼빈에서 태어난 동포들의 역사, 또한 하얼빈을 거쳐 간 동포들의 역사가 녹아 있다. 나는 하얼빈과 중국에서 보낸 기억과 역사의 현장을 모아 하얼빈 곳곳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동토의 땅 하얼빈에서 발로 뛰고 나의 두 다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도 하얼빈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역사의 현장이며 이 글은 내가 15년간 중국에서 보낸 나의 기록이다. 누가 나에게 하얼빈이 어떠한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얼빈이 제2의 고향 이라고 자신 있게 답한다. 하얼빈에는 나의 중년기가 녹아 있다. 나는 2005년 12월 하얼빈에 처음 갔다. 하얼빈은 정말 동토의 땅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추위와 눈이었다. 그때 나 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당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설립해야 했다. 2006년 1월 16일 오 후 15시 역사적 순간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국내가 아닌 하얼빈에 동상 컨 셉 제작, 설치 등 모든 순간들이 숨가쁘게 돌아갔다. 5미터가 넘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꼭두새벽 기중기를 동원해 번개처럼 세웠다. 실로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세워야 할 안중근 의사의 동상.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바로 그곳 하얼빈에 세우는 일인데도 모든 것이 녹록치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동상 제막 프로그램을 점검하였다. 방명록 점검, 시나리오 정 비, 축사, 내빈들의 동선 파악 등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내 차림새는 그야말로 막노동자의 차림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일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 해 그 와중에 중저가 옷가게로 뛰어가 저렴한 상의를 구입했다. 드디어 한국과 다롄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리려는 손님들이 차량을 이용해 단체로 오셨다. 오후 세 시, 민족의 성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 (誅殺)한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회를 보았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지 가슴이, 심장 이, 온몸이 떨렸다. 이것이 나의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독립운동의 성지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안중근 의사를 사랑하는 행동가들에 의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동상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11일, 열하루 만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 계셨던 그 11일과 동일하게 불 과 11일 만에 숨 막히게 흥분하여 세웠던 안중근 의사 동상을 나는 3년 동안 지하에 모시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동상을 다시 하얼빈 광장에 다시 세우고 싶었지만 그 염원은 하얼빈에서는 다시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안중근 의사 동상이 경기 도 부천의 안중근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셨다. “내가 죽거들랑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그러나 이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공원에 묻히면 바로 그곳이 대한독립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까지 묵살해 버렸다. 당시 하얼빈 일본 총 영사 가와카미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전문을 보내 안중근 의사 유해를 하얼빈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둔 후 일제는 전 세 계인 앞에 자랑스럽게 공판 쇼를 벌이며 마치 일본이 최고의 법을 지키는 문명국인 양 선전을 해댔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이 만든 감옥법 74조를 어겼다. 일본의 감옥법 74조는 사형집행이 끝나면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안중근 의사 두 동생이 유해를 모시기 위해 뤼순에 갔지만 일본은 동생들에게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감옥법을 어 기면서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일본이 감추고 있다. 광복 75주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우리는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밀리 매장한 원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나의 가족이다. 나의 아내 김미애, 나의 사랑하는 아들 김종서 참으로 추운 하얼빈이었지만 가족 간 의 마음은 따듯했던 하얼빈에서 같이 살아온 수많은 시간들의 기록이다. 특히 하얼빈 이공대학 국제교류처 김기영 주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임 관장이신 강월화 관장, 침화 731부대 죄증 진열관 임화주임, 더욱이 하얼빈에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하던 첼로 사진 예술원 김창 길 사장의 배려와 격려는 이역만리 하얼빈에서 힘든 시간을 지탱해 나갈 수 있 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하얼빈 빈현 검찰청에서 강직하게 살아오신 苑?彬님 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중한 지면을 섬세하게 다듬어 주신 안중근 의사 홍보대사 문영숙 작가와 글의 품격을 높여 주신 박혜선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다시금 감사함을 드린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낀다. 하얼빈의 여행자들은 더 깊은 하얼빈을 찾아 보시길 권한다. 중앙대가에서 송화강과 만나는 방홍기념탑에 새 겨진 조선족 여인, 동북 열사 기념관에 전시 소개된 경북 의성 출신 한국인, 서 울 구로구청에서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은 처음 어디에 세웠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하얼빈에 가장 큰 한국기업으로 전임 대통령이 방문했던 기업은 어느 기업이며 지금은 어찌되었을까? 하얼빈에 현재 거주하는 로봇 공학 으로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동포 학자는 어느 분일까? 이에 대한 물음을 찾아 가는 하얼빈 여행길은 더욱 풍성하고 알차진다. 본 내용은 책에 일부러 수록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관심을 갖고, 만나는 하얼빈 시민들과 질문을 통해서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이 하얼빈 여행을 하시는 분들을 위한 필독서가 되길 바란다. 또한 하얼 빈을 고향으로 둔 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책이 된다면 좋겠다. 2020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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