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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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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황규관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8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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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내가 지은 집에는 내가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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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여기에 묶인 글 중 1부는, 내 삶의 문양들이 약간이나마 음각되어 있는 글들이 더러 있다. 나는 아직도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햇볕에 고스란히 내놓을 자신이 없다. 이 도저한 자기노출의 시대에 그것은 아무래도 마이너스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래서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 글도 있는데, 사실 그런 글도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짧게나마 세상에 대한 발언이다. 그것도 시사적인 직접 발언은 가급적 삼갔다. 아무래도 그쪽은 내 피의 색깔과 친연성이 떨어진다. 2부에서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비평을 시도해 봤다. 대부분 이런저런 지면의 부탁으로 쓴 것인데 억지스러운 면이 적지 않다. 왜냐면 시를 쓰는 내게는 감당키 어려운 형식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중언부언한 이유는 또 있다. 내게는 현상의 배후에 대한 집착이 있는데 그만한 힘과 실력이 없으니 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책임을 회피하자는 게 아니라, 이렇게나마 한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3부에서는 문학과 시에 대한 내 생각을 피력해 봤다. 나는 문학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틈새에 아집과 독단이 없지 않다. 이것은 독학자의 특징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고 힘이기도 하다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김남주, 김수영, 백무산에 대한 글은 내가 정신적으로 사숙했던 시인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아직도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아포리아aporia이다. 나는 스승과 대결하는 제자가 되고 싶지, 맹종하는 모범생이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사랑해야 했다.

리얼리스트 김수영

김수영에게는 우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으며, 그는 그 복판에서 사유하고 시를 썼다. 김수영은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을 통과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재구성함과 동시에 현실의 변화를 꾀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김수영의 시가 나왔다고 믿으며, 설령 그의 시적 양식이 재현을 뼈대로 하는 리얼리즘은 아니지만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서슴없이 부르고 싶었다. (…) 나는 이렇게 잔인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시가 어떻게 댄디(dandy)한 모더니즘으로 그동안 읽혔을까 하는 의문을 내내 버리지 못했다. 확실히 그의 시에는 전쟁과 혁명, 그리고 반혁명으로 인한 상처가 깊이 배어 있다. 그가 언제나 열에 들떠 외친 자유와 사랑을 그의 현실을 떼어내고 말한다는 것은, 과장을 섞어 본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작은 현실을 비추고 작은 현실을 통해 큰 역사적 사건을 사유했다. 그 사유가 격렬해질 때, 그때서야 그는 시를 썼다. 그의 난해와 난삽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힘과 용맹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는 정지된 상태에서 시를 쓰지 않고 숨이 가쁘도록 뛰는 중에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출근길에 아이들 놀이터 주위에 심어진 나무의 가지를 모두 잘라내는 것을 보고 격분해 시청에 따졌다. 그 이상은 자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퇴근길에 보니 이미 가지를 잃은 나무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나무와 풀과 냇물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현대인의 정신이 사막이 되어가는 것을 자주 느낀다. 나를 소박한 자연주의자로 불러도 상관없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이 지어준 가건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독자적으로 진화해온 것처럼 우기고 있다. 맘대로 하라지. 나는 오늘도 흐르는 냇물을 보며 내 영혼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2019년 가을에

정오가 온다

시집을 한 권 한 권 보탤수록 어떤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바닥이 짚이지 않는 이것은 무엇인 걸까. 의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이제 알 때도 되었지만, 영혼이 바람이 되는 일은 아직 멀어 보인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지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시를 쓰는 순간의 기쁨만은 내려놓고 싶지 않다. 더 아프겠다.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시가 단순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듯이 삶도 현실의 노예가 아니어야 할 텐데 감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몸이 아프다. 현재가 과거에 속박되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는 현재의 심층에서 언제나 운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게 시간의 속성이라면 미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담한 시절에 부끄러운 내면을 내보이며 요설이 삶을 더럽힐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다만 엄청나게 두꺼운 시간 속에서 내가 한 올 한 올 풀어지고 있는 지점에 와 있음을 부정하기는 이제 어려울 듯싶다. 퇴락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서 말이다.

패배는 나의 힘

시인을 동경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때가 20년 전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되었는가? 까짓 혼자 끙끙대며 쓴 시가 활자화되었느냐를 따진다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실 너무 오래 결핍에 괴로웠었다. 그것은 내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태생과 어린 시절이 그 배경이었다. 그래서 나의 이력서는 지금도 허름하고 심지어 영혼마저 누추하기 그지없다. 혹 내 시에서 ‘선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의 남루가 빚어낸 어떤 왜곡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변두리에서 혼자 강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면, 괜찮은 일 아닌가? 혹은 어스름과 통속적인 주점이라면? ‘나’라는 물건은 숱한 인연의 다른 이름이므로 여기까지 오게 한 인연들께, 그리고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준 모든 산파들께 따뜻한 자동판매기 커피 한잔 드린다. 다들 양지바른 곳으로 가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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